항목 ID | GC04205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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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亨律 |
영어음역 | Gim Hyoung Ryul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수정 아파트 3호동 A-206호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진성 |
[정의]
부산 출신의 원자 폭탄 피해자 2세 환우이자 인권 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1970년 7월 28일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수정 아파트 16동 206호에서 아버지 김봉대(金鳳大)와 어머니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곡지(李曲之)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1. 어머니의 히로시마 피폭
김형률(金亨律)은 1982년 동일초등학교[현 동일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부산서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86년 송도상업고등학교[현 부산관광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97년 동의공업대학 전산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5세의 나이로 원자 폭탄에 피폭을 당하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長崎]의 전체 원폭 피해자 수는 대략 70만 명으로, 그 가운데 10% 가량인 7만여 명이 한국인이었다.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합천과 경기도 평택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1940년대 이후 전시의 강제 부역으로 일본으로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원자 폭탄이 떨어진 현장에 있게 된 사람들이었다.
해방 이후 이들 가운데 생존자의 대부분은 고국으로 귀향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의료적·경제적·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질병과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살아왔다.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내세우는 일본도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들을 철저히 도외시하였다. 1965년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질 때 맺은 이른바 ‘청구권 협정’으로 국가적 보상은 완료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들은 피폭 후 20여 년이 지난 1967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단 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결성[1971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하여 끈질긴 권리 투쟁을 벌였으나 계속되는 세상의 무관심을 타파하지는 못하였다.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도 이러한 경우였다. 이곡지는 피폭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으로 귀향하였으며, 1960년 10월 김봉대와 결혼하였다. 이곡지는 히로시마의 피폭 사실을 생생히 기억했지만 피폭의 유전 여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게다가 김형률 외의 다른 자식은 건강하였다. 김형률과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김명기가 1년 6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으나, 가족은 그 일을 애써 잊었고, 가족 모두, 심지어는 김형률 스스로도 그의 병고는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겼다. 이 때문에 이후 김형률이 원자 폭탄 2세 환우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가족은 그의 활동을 선뜻 이해하기 힘들어하였다.
2. ‘원자 폭탄 2세 환우’로서의 정체성 인식
하지만 키 163㎝, 몸무게 37㎏의 왜소한 체구로 늘 기침을 달고 살던 김형률은 유년 시절부터 온갖 병치레에 시달렸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급성 폐렴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한 후 줄곧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쳐서 뒤늦게 27세의 나이로 동의공업대학 전산과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직장을 찾던 중 급성 폐렴으로 입원하였다. 2001년 5월 병원에서 김형률은 우연히 의학 논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병을 다룬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1995년 김형률이 침례병원에 입원했을 때 주치의가 그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였다는 것이었다.
이 논문을 통해 김형률은 자신의 병이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결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의 지병이 개인의 우연적인 질환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인 피폭으로 인한 유전병임을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삶 전체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김형률은 원자 폭탄에 피폭당한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이 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래 전의 과거로 의해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결국 김형률은 자신을 ‘원자 폭탄 2세 환우’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은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 운동의 활로를 여는 결과를 만들었다. 김형률은 원자 폭탄 피해자 운동이 ‘스스로 인간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인권 회복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운동의 핵심은 원자 폭탄의 피해가 유전된다는 인식에 있었다. 그때까지 원자 폭탄 피해자들이 원자 폭탄의 유전성 여부를 금기시해 온 것은 피해자의 자녀들이 혹여 받을지 모를 사회적 차별 때문이었다. 이러한 오랜 억압을 타파한 것이 바로 부산 시민 김형률의 위업이었다. 김형률은 과감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싶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경제적 빈궁이나 사회적 차별보다 더욱 시급히 타파되어야 할 것은 바로 생명을 유지할 권리의 박탈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2002년 3월 22일 김형률은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자신이 원자 폭탄 후유증을 앓는 원자 폭탄 피해자 2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때부터 김형률의 인권 운동은 본격화되었고, 이후 ‘선천성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지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인 원자 폭탄 피해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데 온몸을 바쳤다. 이러한 김형률의 몸짓은 부산 지역을 넘어 한국 시민 사회 운동 전체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3. 한국원폭2세환우회 조직과 활동
그러나 김형률은 외부 세력에 전적으로 기대기보다는 아픈 원자 폭탄 2세들이 서로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자발적 모임, 즉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조직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에 2002년 8월부터 인터넷 다음 카페에 환우회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2003년부터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결성인 셈이었다. 처음에 합천군 봉산면의 최정식과 김형률 단 두 명으로 꾸렸던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인원은 김형률이 사망할 때까지 67명으로 늘어났다.
2003년 8월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비롯하여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총 8개 시민 단체가 참여하는 ‘원폭 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발족되어 곧바로 정부 차원의 실태 조사와 진상 규명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 결과 2004년 10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원폭 2세 건강 검진을 시행할 수 있었다.
이듬해 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 현황 및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였는데, 원자 폭탄 피해자 1세와 2세 모두 일반인에 비해 질병 발생 위험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 명백한 통계 자료로 드러났다. 2005년 4월 김형률은 국회를 방문하여 ‘한국 원자 폭탄 피해자와 원자 폭탄 2세 환우의 진상 규명 및 인권과 평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지병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전력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5년 5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참가하고 귀국 한 후 닷새 만인 5월 29일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부산 시민 김형률의 인권 운동은 원자 폭탄 유전병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한국인 원자 폭탄 피해자의 현실을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이는 2000년대 한국 사회에서 뒤늦게 꽃핀 소수자의 인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회적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김형률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매진했던 특별법 제정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묘소]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1494-1번지의 영락 공원 제2영안실 제31실 64723호에 봉안되어 있다. 2006년 5월 24일 김형률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5월 28일 부산 민주 공원에서 제1회 추모제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