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311 |
---|---|
한자 | 金主益 |
영어음역 | Gim Jooik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현정길 |
[정의]
부산 출신으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서 활동한 노동 열사.
[가계]
김주익(金主益)은 1963년 2월 2일 부산광역시 영도에서 태어났다. 부인 박승희와의 사이에 김준엽, 김혜민, 김준하 3남매를 두었다.
[활동 사항]
1. 한진중공업 입사
김주익은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이주하여 태백기계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81년에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82년 취직을 위해 다시 부산으로 와서, (주)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서 운영하는 직업 훈련소에 입소하고, 그 해 8월 1일 (주)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였다. 1989년 5월 28일 (주)대한조선공사는 한진그룹에 인수되어, 1990년 7월 회사명이 한진중공업으로 바뀌었다.
1990년 8월 김주익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서 제28대 대의원과 문화체육부장을 역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주 노동조합 수립에 성공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1990년으로 들어 단위 사업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노동조합위원장 박창수의 주도로 ‘전국노동자협의회[약칭 전노협]’에 가입하였다. 이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조합원만 2,000 명이 넘는, 전국노동자협의회 가입 사업장 중 최대 규모의 사업장으로,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약칭 부노련]’의 간판 노동조합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주익은 박창수의 노선을 지지하며, 1991년 2월 6일 대우조선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약칭 연대회의]’가 개최한 2월 10일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 박창수와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서 김주익은 다행히 체포를 면했지만, 박창수는 제3자 개입 금지와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결국 5월 6일 의문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2.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
함께하던 동료의 처참한 최후를 지켜보게 된 김주익은 이후 그의 못 다한 삶까지 살아 내려 결심하게 되고, 이는 민주 노동조합 사수로 귀결되었다. 1992년 8월 김주익은 노동조합 제30대 수석부위원장이 되고, 1993년 8월에 제31대 사무국장을 맡아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 파업인 LNG 선상 파업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어 강제로 휴직되었다. 하지만 석방 후 끈질긴 복직 투쟁으로 1년 후인 1995년 8월 다시 공장으로 돌아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산업안전보건위원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6년과 1997년에 연속해서 제34대, 제35대 대의원으로 당선된 김주익은 이후에도 수년 동안의 노동조합 활동 끝에 2000년 11월 5일 한진중공업 통합 노동조합 초대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이 무렵 조선(造船) 산업의 노동조합 상당수가 회사 측의 경영 합리화 정책으로 무력해졌다. 이 때문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유일하게 전국노동자협의회 시절부터 이어지는 민주 노동조합의 전통이 살아 있는 사업장이었다. 이러한 한진중공업에 2001년 말부터 정리 해고라는 파상적 공세가 예고되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노사 간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 해고를 단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600여 명이 잘려 나갔다.
이를 위해 회사 측은 파업과 농성 등 노동조합의 활동에 손해 배상과 같은 민사·형사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노동조합 간부 110명에 18억 원에 이르는 손해 배상 가압류 처분을 걸어두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고발했으며, 26명의 노동조합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한진중공업은 2002년 1조 6,000억 원 매출에 239억 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 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 가고 있었다. 반면 21년 동안 한진중공업에서 근무한 김주익이 받는 월급은 기본급 108만 원이었다. 이는 각종 공제를 떼고 나면 80만 원을 겨우 넘는 액수였다.
3. 목숨을 바친 마지막 투쟁
이런 상황에서 2002년 11월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진중공업 지회장[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에 재당선된 김주익에게 애초에 선택의 폭은 너무나 좁았다. 정리 해고와 손해 배상 가압류에 대항하는 투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분신 소식이 전해졌다. 회사의 손해 배상 소송은 노조 간부의 활동을 압박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임이 분명해진 셈이었다. 2003년 2월부터 5월까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이 총력 투쟁을 벌였지만 회사는 완강하게 대응하였다.
이윽고 손해 배상 가압류로 노동조합의 조합비가 압류되면서 투쟁 기금이 바닥나자 노동조합 간부들도 지쳐 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하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에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이는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경찰은 그 호소를 무시하고 수시로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참여 정부는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았다. 회사 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도 성의 있게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되는 날 김주익은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매어 최후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주익의 자살 소식이 전해지자 흩어졌던 조합원들이 다시 모여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많은 이가 농성 대열에 합류하였다. 투쟁은 다시 힘차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진중공업 사태는 10월 30일 곽재규의 투신 자결이라는 희생을 더하고, 11월 6일과 12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두 차례의 총파업을 거치고서야 노사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노사 합의로 정리 해고 철회와 임금 인상, 유가족 보상, 그리고 1986년 이후 누적된 해고자 10명 전원이 복직되었다. 오직 단 한 사람 김진숙만 제외되었다. 제외 사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진중공업 사측의 변명은 외압이 너무 강해 김진숙은 도저히 불가피하였다고 한다. 이 합의는 한진중공업 노사 관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쪽의 주장이 전폭적으로 수용된 사례였고, 대기업에서는 자주 있었던 것이지만 한진중공업에서는 처음인 해고자 복직 조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 173번지의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이후 매년 10월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과 열사정신계승사업회가 추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4년 10월에는 추모 자료집 『85호 크레인』이 발행되었으며, 2005년 10월에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건너편에 ‘추모 공원’과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열사 합동 추모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