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문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293
한자 金文甲
영어음역 Gim Mungap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절영로 216[영선동 4가 100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통일 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위원장
출생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3년 - 와세다대학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경남자동차 공제회 설립, 회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조선건국동맹 서울 이남 조직책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1월 12일 - 조선인민당 중앙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7년 5월 24일 -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5월 -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준비위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0년 11월 1일 -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위원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11월 -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감
활동 시기/일시 2000년대 초 - 코리아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결성
몰년 시기/일시 2004년 7월 11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신하리 17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4가 1003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3동 447-3 삼익아파트 10동 202호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東京]
활동지 사회대중당 -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4가 1003지도보기
활동지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월성동
활동지 코리아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3동 447-3 삼익아파트 10동 202호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혁신계 정치인이자 중립화 통일 운동가.

[가계]

김문갑(金文甲)은 1909년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신하리 17번지에서 태어났다. 간호사 출신의 정귀영과 결혼하여 2남 5녀를 두었는데,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허성관이 넷째 사위이다.

[활동 사항]

김문갑은 1931년 마산에서 자동차 운전기사를 위한 공제회인 경남자동차공제회를 만들고 회장을 지냈다. 1933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공부를 하였고, 귀국 후에는 1938년 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약종상(藥種商)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4년 김문갑여운형(呂運亨)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서울 이남 지역의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김문갑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결성에 조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하였다. 여운형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김문갑은, 다양한 정파들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주도권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여운형을 지원하였다. 1945년 11월 12일 여운형조선인민당을 창당하자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창당했을 때도 중앙위원을 역임하면서 여운형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김문갑은 마산약학대학[현 부산대학교 약학대학 전신]의 설립기성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정권 말기인 1957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부산에 거주하면서 4·19 혁명을 맞았던 김문갑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혁신 세력의 집결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다시 정치 활동에 나섰다.

4월 29일 부산에서는 혁신세력집결촉진회가 개최되어 「국가보안법」 폐지와 국민적 차원의 활발한 통일 논의를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혁신 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5월 서울에서는 사회대중당 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부산에서는 사회대중당 경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되자, 김문갑은 마산의 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에 그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비록 7월 29일 총선에 출마하여 낙선했지만 김문갑은 총선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된 통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1960년 후반 전국을 휩쓴 통일 운동에서 김문갑은 영세 중립화(永世中立化) 통일론을 내세우고 부산과 마산을 거점으로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세 중립화 통일론이란, 통일된 한반도가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와 같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념적 중립성을 영원히 유지할 것을 전제로, 주변 강대국의 양해를 통하여 통일을 달성하려는 논리이다. 이는 주변 강대국의 양해 없이 한반도의 통일은 불가능할 것인데,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념 체계를 선택한다면 두 진영 가운데 한쪽은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문갑은 1960년 11월 1일 마산시 월성동에서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한의 자주적인 교섭으로 한국의 영세 중립화 통일을 진행하여 자주 독립을 기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1961년 11월 그는 5·16 군사 정변 세력의 군사 법정에 의해 ‘한국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기소되어, 8년간의 수감 생활을 치르고 출옥하였다. 2000년대 초 김문갑은 부산에서 코리아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경상남도 일원을 중심으로 중립화 통일 운동을 확산시키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로 가서 치료를 받다가, 2004년 7월 11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코리아영세중립화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간행한 『코리아의 영세 중립과 민족 통일』[도서출판 경남, 1997]이 있다. 번역서로는 브루스 커밍스 등의 『두 개의 조선 하나의 미래』[도서출판 경남, 2000]를 공동 번역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