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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200
한자 掘立柱建物址
영어의미역 Remains of High-standing Building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김영민

[정의]

부산 지역에 있는 삼한 및 삼국 시대 때 기둥을 세워 만든 창고용 건축물.

[개설]

일반적으로 굴립주 건물(掘立柱建物)이란 기둥의 밑동을 땅속에 박아 세우는 건축 방식으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땅 위나 땅속에 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넣어 만든 건물로, 지표면 위에 생활면을 설치한 건물 모두를 총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지상식 건물(地上式建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원]

굴립주 건물이 생겨난 데에는 각 지역과 민족의 생활 풍습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삶의 과정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고안되었을 것이란 점이다. 벼과 식물을 재배하면서 수확한 곡식을 안전하게 저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저장 공간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 등장한 굴립주 건물은 주로 곡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굴립주 건물은 청동기 시대 전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굴립주 건물지는 비교적 규모가 큰 것이 많았으며, 주거 공간 내 중심부에 위치하여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철기 시대인 삼한 시대에 들어서면 건물들은 기능적으로 복잡해지고 다양해진다. 주거 공간과는 별도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유사한 형태로 방어적 성격의 초소와 같은 시설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 시대에도 수혈 주거지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굴립주 건물은 별도의 공간에 만들어졌는데, 이때 굴립주 건물들은 주거 공간과 분리된 공동의 저장 시설이었다.

굴립주 건물지가 수혈 주거지와 분리되거나 독립적으로 군집된 양상을 보이는 경우는 기장군에 있는 가동 유적에서 조사되었다. 독립적인 마을 유적에서 굴립주 건물지만 확인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장군에 있는 고촌리 유적, 김해 아랫덕정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7세기에 이르면 중국 당(唐) 문화가 유입된 이후 새로운 건축 양식이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기와의 본격적인 사용과 맞물려 건축 기술 수준의 동반 상승 등 주거 문화에 대한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주거 문화의 변화 과정에서 굴립주 건물은 고려 및 조선 시대에는 임시 거처, 보관용 창고 등의 용도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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