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186 |
---|---|
한자 | 龜浦洞保導聯盟員虐殺事件 |
영어의미역 | Massacre of Converted Anti-Communist Group Members in Gupo-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진 |
[정의]
6·25 전쟁 초기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일원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보도연맹원을 잡아들여 살해하기 시작했다. 북한 인민군에 동조해 적대 행위를 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이유였다. 전쟁 당시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읍이었던 구포동에서도 1950년 9월경 보도연맹원들이 예비 검속되어 살해되었다.
[경과]
구포읍에는 국민보도연맹 조직 확대 과정에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가입된 주민이 많았다. 당시 이곳에 살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주민 이 모[2001년 증언 당시 78세]는 “마을 구장이 할당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마음대로 도장을 찍어대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이 무더기로 가입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자신이 가입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증언하였다.
이 모는 “당시 내가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구장이 집으로 찾아와 도장을 달라기에 줬더니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나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놓았다”면서 “당시 보도연맹이 뭐하는 단체인지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하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경찰이 나에게 조심하라고 말해 그때서야 내가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하였다.
구포읍 보도연맹원들은 1950년 9월께 동래경찰서 구포지서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당시 구포읍 구복동에 있던 은행 건물에 며칠 간 갇혀 있다 김해 생림면 나밭 고개 등지로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이 모는 “나는 그때 군에 입대해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지만 나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던 구장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하였다.
구포읍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보도연맹원을 한 곳에 집결시키지 않고 경찰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연행하였다. 경찰은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을 며칠 뒤 트럭에 태워 모두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천막을 덮어 김해 생림면으로 데려갔다. 당시 마을에는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김해 생림면의 한 우물 속에 밀어 넣고 총을 쏴 모두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과]
구포동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구성된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구포읍에서 58명이 살해됐다고 확인하였다. 학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오 모는 1960년 5월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군인들이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구포읍내 남선(南鮮)곡산회사 창고와 상은(商銀) 창고에 가둔 뒤 매일 몇 사람씩 트럭에 싣고 김해 생림에 있는 나밭 고개로 데려가 총으로 쏴 죽였다”면서 “학살 현장에서 7명 살아 돌아왔지만 거의가 불구의 몸이 되고 말았다”고 증언하였다.
구포동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해당 지역에 생존한 보도연맹원이 있어 사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드러났다. 예비 검속에서 구금, 살해까지 전 과정이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조사된 적이 없어 정확한 피해 실태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