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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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在圭 |
영어음역 | Gak Jaegue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5가 29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현정길 |
[정의]
부산 출신으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한 노동 열사.
[가계]
곽재규(郭在圭)는 1955년 7월 18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아내 정갑순과의 사이에 곽경민, 곽영욱 두 딸을 두었다.
[활동 사항]
곽재규는 1974년 2월 금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입사하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1989년 2월 동의전문대학[현 동의과학대학교]을 졸업하였다. 1987년부터 곽재규는 ‘노조 민주화를 위한 현장 활동가 모임’에 참가하여 활동해 왔다. 곽재규가 있던 모임이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을 벌인 지 4년 만인 1990년 7월 박창수(朴昌洙)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적인 노조 집행부가 한진중공업에 들어섰다.
1993년 9월 곽재규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교육선전차장을 맡으면서 조합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음 해인 1994년 9월 문화체육부장을 맡았고, 이후 1995~1997년 3년간 부서 대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1998~2000년 10월에는 조합 활동을 쉬었다가 2000년 11월부터 다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문화체육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조선(造船) 산업의 노동조합 상당수가 회사 측의 경영 합리화 정책으로 무력해졌다. 이 때문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시절부터 이어지는 민주 노조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은 한진중공업이 유일한 사업장이 된 실정이었다.
이러한 한진중공업에 2001년 말부터 정리 해고라는 파상적인 공세가 예고되었다. 2001년 말과 2002년 3월 초 회사 측은 두 차례에 걸쳐 구조 조정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가정 통신문을 보내더니, 이윽고 노사 간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 해고를 단행하였다. 그것을 시발로 2002년 한 해 동안 약 600명의 노동자가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한진중공업은 2002년 1조 6000억 원 매출에 239억 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 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 가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구조 조정 작업을 계속했고, 이를 위해 파업과 농성 등 노동조합의 활동에 손해 배상과 같은 민사·형사 소송을 제기하였다. 노동조합 간부 110명에 18억 원에 이르는 손해 배상 가압류 처분을 걸어 두고 노동조합 간부 14명을 고소 고발했으며, 26명의 노동조합원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였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9일 경상남도 창원시의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가 손해 배상 가압류와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회사의 손해 배상 소송은 노동조합 활동을 압박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임이 분명해진 것이었다.
이에 저항하여 민주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주노총] 소속의 전국금속노동조합은 전국적으로 1월 22일 하루 파업을 결의하였으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도 1월 22일에 파업에 들어갔다. 이후 2003년 2월부터 5월까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5차례의 총력 투쟁 기간을 설정하고, 서울 상경 투쟁, 부분 파업, 전면 파업 등 총력전을 전개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완강하게 압박하는 회사와의 교섭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손해 배상 가압류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조합비가 압류되어 투쟁 기금이 바닥나면서 노동조합 간부들도 지쳐 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6월 11일 밤 노조 위원장 김주익(金主益)이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참여 정부는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 박고 수시로 공권력을 투입했으며, 회사 측도 성의 있게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7월 22일로 총파업을 예고하였다.
파업을 위한 투쟁 대오가 불어나자 회사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보상과 고소 고발 및 회사 폐업 등의 회유와 협박을 가하며 압박하였다. 그러자 여름 휴가철을 지나면서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서서히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두 달 넘게 파업이 지속되면서 곽재규 역시 극도의 궁핍한 상황에 이르렀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에 병석에 누운 장모까지 부양하는 가정 경제를 부인의 신문 배달만으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회사가 제시한 명예 휴직 수당 70%를 받으며, 추석 이후 파업 대오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그 해 10월 14일 밤 회사는 노동조합원을 따돌리고 제4 도크에 완성해 놓은 컨테이너선을 진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농성단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손해 배상 가압류 소송과 징계 위협에 배까지 진수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조합원이 투쟁 현장을 떠났는데, 10월 16일 아침 투쟁의 광장 보고 대회 때 참석한 사람은 7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절망한 김주익은 결국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되는 날인 10월 17일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김주익의 자살은 곽재규에게 엄청난 충격과 자괴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시신 없는 김주익의 빈소에 아침마다 찾아와 슬피 울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이 투쟁 현장을 떠난 것이 김주익이 자결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책은 결국 곽재규의 죽음을 불러 왔다. 김주익이 죽어서도 85호 크레인을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곽재규가 투신 자결하였던 것이다.
곽재규의 투신으로 졸지에 두 명의 동료를 잃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슬픔은 극에 달하였다. 여론도 회사 측의 비정한 태도를 질타하였으므로, 회사 쪽도 더 이상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다. 여기에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주도하여 11월 6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한 총파업과 11월 12일 전국 100여 개 사업장 15만 명이 참가한 총파업을 거치면서 노사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노사 합의로 정리 해고 철회와 임금 인상, 유가족 보상, 그리고 1986년 이후 누적된 해고자 10명 전원이 복직되었다. 오직 단 한 사람 김진숙만 제외되었다. 제외 사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한진중공업 측의 변명은 외압이 너무 강해 김진숙의 복직은 도저히 불가피하였다고 한다. 이 합의는 한진중공업 노사 관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조합 쪽의 주장이 전폭적으로 수용된 사례였고, 대기업에서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한진중공업에서는 처음인 해고자 복직 조치였다.
2003년 11월 16일 김주익과 곽재규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를 기리는 추모 공원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에 세워졌다. 식당이 새로 지어지고, 임금과 성과급도 올라갔다. 수십 년을 싸워도 이루어지지 않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산173번지의 솥발산 공원묘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4년 이후 매년 10월에 한진중공업 노동조합과 열사정신계승사업회가 회사 내 민주 광장과 솥발산 공원묘원에서 추모제를 열고 있다. 2004년 10월에는 추모 자료집 『85호 크레인』이 발행됐으며, 2005년 10월에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건너편에 ‘추모 공원’과 ‘박창수·김주익·곽재규 열사 합동 추모비’가 제작,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