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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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共非理聽聞會 |
영어의미역 | Hearing for the Irregularities of the Fifth Republic |
이칭/별칭 | 제5 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남포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재환 |
[정의]
1988년 13대 국회의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에 대한 부산 지역의 활동.
[역사적 배경]
1988년 13대 국회에서 여소야대[여당보다 야당의 의석수가 많은 상황]의 국면이 형성되자 다수를 차지한 야당은 10월 국회의 국정 감사권을 부활시키고, 11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제5공화국의 권력형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청문회가 열리는 국회 바깥에서는 전두환(全斗煥), 이순자(李順子)의 구속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여졌다.
[경과]
국회에서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리던 1988년 10월 국회 밖에서는 5공 비리 진상 규명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부산 지역 대학생들의 5공화국 청산 투쟁은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 대각사와 미화당 백화점 앞을 주 무대로 하여 시위와 집회를 통한 대국민 선전전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집회 이후에는 부산역을 지나 서면까지 가두 투쟁을 벌였다.
11월에는 재야 단체의 참여로 전국적인 궐기 대회가 이뤄지면서 열기가 가히 6월 민주 항쟁에 비유될 정도로 드높았다. 1988년 11월 5일 부산에서 열린 ‘전두환·이순자 구속을 위한 범국민 총궐기 대회’에는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고, 집회 후에 참가자들은 부산직할시 중구 남포동에서 서면까지 평화 대행진을 벌였다.
이 기간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교내 외에서 지속적으로 집회를 이어갔으며, 11월 17일에는 넉넉한 터[본관 옆의 운동장]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개최한 ‘전·이 구속을 위한 민족 효원 비상 학생 총회’에 1,000여 명이 모여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교문 앞 시위를 시도하였다. 19일에는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벌을 위한 제2차 부산 시민 궐기 대회’와 평화통일 민주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주관하는 평화 대행진[부산진역→ 고가 도로→ 부산진 시장→ 범냇골→ 서면]에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한편 5공 비리 청문회는 부산직할시 동구의 초선 의원인 노무현(盧武鉉)을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다. 노무현은 책임 회피로 일관하는 전두환의 단상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며 격렬히 항의하고, 청문회 내내 다른 의원들과는 달리 송곳 같은 질문을 퍼부으며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결과]
5공 비리 청문회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열린 청문회였으나 전두환 등 관련자 대부분이 책임을 부인하고 변명으로 일관함으로써 큰 성과는 없이 막을 내렸다. 11월 23일 전두환은 대국민 사과 후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백담사에 은둔하였다.
[의의와 평가]
5공 비리 청문회 진행 과정에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전두환 정권의 비리와 5·18 민주화 운동에 관한 사실들이 국민 앞에 밝혀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