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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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節記念集會發砲事件 |
영어의미역 | Firing at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ssembl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철규 |
[정의]
1947년 부산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집회에서 경찰이 총을 발포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좌우익이 각각 준비하여 개최하였는데, 행사 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경찰은 발포까지하면서 진압에 나섰기 때문에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충돌은 부산, 제주도, 정읍, 순천 등지에서 특히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부산에서는 해방 후 각종 기념행사에 있어서 좌우익이 단일한 보조를 취하여 치러낼 노력을 하였으나, 매번 군정 당국에서 허가하지 않아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7년 3·1절 기념행사는 전국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우익 세력은 공설 운동장에서, 좌익 세력[민주주의민족전선]은 충무동 광장에서 각각 개최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주최로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부산 3·1절 기념 시민대회’에는 약 10만여 명의 대중이 참여하였다.
[경과]
대회는 순조로이 진행되었으나, 부산해원동맹원이 축사를 하던 중 이승만(李承晩)을 이완용(李完用)이라고 비유한 대목에서 광복청년단원 이운형(李運亨) 등 수명이 갑자기 등단하여 연사를 폭행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이들 청년단원을 체포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경찰에게 테러범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했고, 경찰이 이를 거부하자 흥분하여 투석하였다. 이에 권위상(權魏相) 부산경찰서장이 위협사격을 하자, 이를 계기로 경찰대가 응사하여 대회장은 순간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다.
[결과]
결국 이날 좌우익의 충돌과 경찰의 발포로 최창환 외 5명이 사망했으며 9명이 부상하였다. 경찰의 발포가 문제되자 경찰에서는 이를 남로당의 지시·조종에 의하여 폭력 사태를 유발하려한 계획적인 음모라고 선전하며 남로당 청년부원들을 체포하였다.
[의의와 평가]
1947년 3·1절 기념집회에서의 폭력 사태는 외형적으로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표출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우익 정치 세력들의 방해 때문이었으며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3·1절 기념집회 발포 사건으로 분노한 대중들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이끄는 1947년 ‘3·22 총파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6월 14일 당시 발포 책임자였던 권위상 서장이 피살되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