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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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吉九 |
영어음역 | Yun Gilgu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보영 |
[정의]
부산방송국 방송국장을 역임한 언론인.
[활동사항]
윤길구(尹吉九)는 1916년 10월 3일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나 1940년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전신] 불교과를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3년 윤길구는 서울중앙방송국에서 5명을 뽑는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 합격하면서 방송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모든 방송 권한이 일제로부터 넘어 오던 시기에 방송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선배 아나운서 이계원이 방송과장, 민재호가 방송계장을 맡았다. 윤길구와 동기였던 문제안이 방송 기자가 되었고, 윤길구와 이덕근은 아나운서 주임이 되었다. 이후 윤길구는 잠시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부산방송국[현 KBS 부산방송총국]이 중앙 방송국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경력이 오래된 아나운서들이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VUNC]’이나 ‘미국의 소리[VOA]’로 옮겨 가, 윤길구는 다시 방송국에 복귀하여 방송계장을 맡게 된 것이다. 부산 피난 시절을 거치면서 윤길구는 단순한 뉴스 전달자뿐 아니라 뉴스 해설과 논평가로 자리를 굳혀 갔는데, 당시 윤철상이라는 뉴스 해설가와 함께 복잡하게 얽혀 가는 뉴스를 알기 쉽게 해설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노정팔은 『한국 방송과 50년』이라는 책에서 윤길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순수하고 소탈한 성품과 같이 방송도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하여 구수하고 시원시원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는 뉴스, 행사 중계 등 모든 방송을 담당해왔으나 그 중에서도 야구 중계에 뛰어나 이때 야구 중계방송은 혼자 도맡아 하였다. 전국에 야구팬이 많아 언젠가 대구 지방으로 각도 자랑 녹음 방송을 갔다가 크게 환대를 받으며 야구 중계방송을 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 일도 있다. 그는 후배 양성에도 힘써 최승주·황우겸·박종세에게 야구 중계방송의 바통을 이어받게 하였다.”
1956년에 윤길구는 6개월간의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방송과장에 임명된 후 방송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1958년 4월부터 1961년까지 윤길구는 부산방송국[현 KBS 부산방송총국] 방송국장을 지냈는데, 곧 5·16 군사 정부에서 대북 방송과 해외 방송 강화를 위해 국제 방송국을 신설하고 윤길구를 국장으로 내세웠다. 이후 노정팔에게 국장 자리를 내주고 중앙방송국장이 되었다.
1963년에 잠시 중앙공보관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그 해 5월에 윤길구는 두 번째로 중앙방송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곧 방송과는 거리가 먼 국립극장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방송계를 떠나게 되었고, 건강이 나빠져 1966년 5월 16일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든 방송인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사단법인 한국방송인동우회[약칭 방우회]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