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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403
한자 李炳注
영어음역 Yi Byeongju
이칭/별칭 나림(那林)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순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소설가
성별
본관 합천(陜川)
대표경력 소설가|『국제 신보』 논설위원
출생 시기/일시 1921년 3월 16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북천공립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3년 - 양보공립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6년 - 진주공립농업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40년 - 진주공립농업학교 퇴학
수학 시기/일시 1941~1943년 - 메이지대학 전문부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43년 - 와세다대학 불문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학병으로 징집됨
활동 시기/일시 1946~1949년 - 진주농림중학교 교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1년 - 해인대학 강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국제 신보』 논설위원으로 초빙됨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국제 신보』 주필 겸 편집 위원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혁명 재판에서 10년 구형, 2년 7개월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65~1967년 - 『국제 신보』 논설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77년 - 한국 문학 작가상, 한국 창작 문학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84년 - 한국 펜 문학상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0년 - 『신경상남도 일보』 명예 주필 겸 뉴욕 지사장에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92년 4월 3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2년 - 이병주 문학제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7년 - 이병주 국제 문학제 개최, 이병주 국제 문학상 신설
추모 시기/일시 2008년 4월 - 이병주 문학관 건립, 나림 이병주 문학비 건립
출생지 이병주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거주|이주지 이병주 거주지 -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북천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학교|수학지 양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학교|수학지 진주공립농업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학교|수학지 메이지대학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진주농림중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활동지 해인대학 - 경상남도 마산시
활동지 국제신보사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활동지 신경상남도일보사 - 미국 뉴욕
기념시설 이병주 문학관 - 경상남도 하동군 직전리
기념시설 나림이병주문학비 - 경상남도 하동군 읍내리

[정의]

현대 부산 등지에서 격랑의 시대를 복원하여 역사의 진실을 추구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활동 사항]

이병주(李炳注)는 본관이 합천(陜川)이며,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의 이명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나림(那林)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1927년 북천공립보통학교[현 북천초등학교]를 거쳐 1933년 양보공립보통학교[현 양보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몇 년간의 방황 끝에 1936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퇴학당하였다. 이에 일본 교토[京都]로 가서 전검(專檢) 시험을 치러, 중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였다. 1941년 메이지[明治]대학 문예과에 입학하여 1943년 졸업한 뒤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에 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독서 활동을 통해 이병주는 이후 자신의 소설 쓰기에 바탕이 되는 여러 사상가와 문학가들을 폭넓게 만난다.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이병주만큼 다양한 책을 작품 속에 거명한 작가가 없을 정도로, 그의 삶 자체가 책을 통한 편력이었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특히 루쉰[魯迅]을 통해 중립적 지식인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훗날 그가 어떤 사상에도 동조하지 않는 이른바 회색 사상을 정립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독서 활동 과정에서 1944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蘇州]에 배치되었다. 이때의 체험은 역사의 이면을 통찰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설 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1945년 9월 제대한 후 상하이[上海]에 잠시 머물다 1946년 부산으로 귀국하여 귀향하였다. 그해 9월부터 진주농림중학교[구 진주공립농업학교, 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51년 해인대학[현 경상대학교]으로 자리를 옮겨 1950년대 후반까지 근무하였다.

1958년 『국제 신보』 논설위원으로 초빙된 것을 계기로 이병주는 부산으로 이주하여 언론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열었다. 다음 해에 『국제 신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고, 왕성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부산 지역의 언론계에 명성을 떨쳤다. 1960년 4·19 혁명 시기에 이병주의 논설은 부산의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때문에 당국의 검열로 원고가 삭제되기도 하였지만 정론 직필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활동으로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구속되어, 혁명 재판에서 10년을 구형받아 2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한국교원노동조합의 고문이라는 것이 기소의 사유였지만, 실제로는 중립화 통일론을 지지한 때문이었다. 출감 이후 이병주는 1965년부터 1967년까지 『국제 신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1990년 『신경상남도 일보』 명예 주필 겸 뉴욕 지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으로 옥중에서 소설을 통하여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면서 출옥한 이후 소설 쓰기에 전념하였다. 이병주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격랑의 한국 근현대사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어 근대 소설사에서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병주의 소설은 일제 강점기 말의 학병 체험, 광복기의 이념 갈등,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개발 독재 시대로 이어지는 작가의 삶의 역정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는데, 망각되거나 배제된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려는 작가 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증언 소설로서의 한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계속하던 이병주는 1992년 4월 3일 미국에서 역사 소설 『제5공화국』을 집필하다 폐암 선고를 받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병주는 공식적인 등단은 늦었지만 80편이 넘는 중편과 단편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이다. 2006년 한길사에서 그의 소설 세계를 갈무리하여 『이병주 전집』 30권을 발행한 바 있다. 작품으로는 『마술사』[아폴로사, 1968], 『관부 연락선』 1-2[신구문화사, 1972], 『망명의 늪』[서음출판사, 1978], 『산하』 1-6[동아일보사, 1978], 『낙엽』[태창, 1979], 『배신의 강』 상·하[범우사, 1979], 『지리산』 1-10[장학사, 1981], 『남로당』 상·하[청계연구소출판국, 1987], 『이병주 전집』 1-30[한길사, 2006]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장편 『낙엽』으로 한국 문학 작가상,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 창작 문학상,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 펜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02년 이병주 문학제가 개최되었고, 2007년 이병주 문학제가 이병주 국제 문학제로 확대 개최되었으며, 이병주 국제 문학상[제1회 국제 문학상 대상 베트남의 작가 레 민 퀘 선정]이 신설되었다. 2008년 4월 이병주 문학관과 나림 이병주 문학비[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섬진강 변]가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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