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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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Miss Jean Perry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상규 1 |
[정의]
개항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호주 출신의 여선교사.
[활동 사항]
진 페리(Miss Jean Perry)[?~1935]는 호주 빅토리아 주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의 파송을 받고 내한한 초기 호주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1891년 10월 12일 부산에 왔다. 이후 호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옮겨 걸인, 유랑자 및 고아와 맹인 소년·소녀들을 위해 독립 선교사로 일하였다.
진 페리가 부산에서 체류한 4년 동안은 주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진 페리의 편지에 의하면 적어도 1891년 말까지는 부산에는 단 한 사람의 여성 신자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진 페리는 다른 여선교사들과 함께 거주지 주변의 아동·부녀자들과 접촉하면서 부인 성경반을 운영하였다. 또 1893년에는 버려진 세 명의 아동으로부터 시작된 ‘미오라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895년에 미오라고아원의 수용 인원이 13명으로 늘어나게 되자 이들을 교육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895년 10월 15일 여선교사들의 선교관에서 수업 연한 3개년의 소학교 과정인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眞日新女學校)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진 페리가 부산에서 활동한 기간은 길지 못하였다. 1911년 호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의 동료 엘렌 패쉬(Ellen Pash)와 함께 고아원[Garden for Lonely Children]을 설립하고 이때부터 1915년까지 한국에서 봉사하였다. 이때 진 페리는 영국에 있는 친구들의 재정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 곽안련[본명 찰스 클락(C. A. Clark)]에 의하면 진 페리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 고아원과 모든 구호 시설들을 구세군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사상과 저술]
진 페리는 한국의 아동과 부녀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구호와 사랑을 베풀었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호주 선교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진 페리가 호주 장로교 선교부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추측하건데 호주 선교부의 선교 정책과 의견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주 장로교의 공식 문서인 장로교 총회록[Proceedings of the General Assembly,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등에는 단지 ‘그녀의 종교적 견해 때문에[In consequence of her religious view]’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진 페리의 사임서가 본국 교회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떠난 것을 보면 심각한 견해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진 페리는 문필력을 겸한 인물이었다. 한국 선교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저술로는 『True Stories by a British Missionary Woman』 [London, n.d.], 『Twenty Years a Korean Missionary』[London: S. W. Partridge, 1911], 『Chilgoopie The Glad』[London: S. W. Partridge & Co., n.d.], 『The Man in Grey』[London: S. W. Partridge & Co., n.d.]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