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77 |
---|---|
한자 | 姜膺煥 |
영어음역 | Gang Eunghwan |
이칭/별칭 | 명서(命瑞),물기재(勿欺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동표 |
[정의]
조선 후기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무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명서(命瑞), 호는 물기재(勿欺齋). 조선 성종(成宗) 대에 이름을 떨친 문신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11세손으로 고조 할아버지는 숙종(肅宗) 때 함양 군수를 지낸 강필주(姜弼周)이고 아버지는 강주복(姜柱復)이다. 아들은 강재호(姜在浩)이다.
[활동 사항]
강응환(姜膺煥)[1735~1795]은 전라도 무장현[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둘째 아들 강재호가 쓴 가장(家狀)에 의하면, 강응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집안 어른들의 사랑과 칭찬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고 한다. 20대에 접어들어 웅대한 기상과 기개를 품은 강응환은 구구한 문예 따위로는 남아의 큰 뜻을 펼 수 없다는 생각에 글공부를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부친의 뜻을 어기지 못하여 마지못해 학업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억누를 수 없어 「무호가(武豪歌)」라는 가사를 지어 무인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강주복은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예를 익히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강응환은 열심히 무술을 닦아 1770년(영조 46) 경과 정시(慶科庭試)에 급제함으로써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과 급제 후 용양위 우부장(龍驤衛右部將)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사헌부 감찰, 용양위 부호군 등을 역임하였다.
내직을 두루 거친 후 칠원 현감(漆原縣監), 초계 군수(草溪郡守), 대구 영장(大丘營將), 고령진 첨사(高嶺鎭僉使), 창성 부사(昌城府使) 등의 외직을 역임하고 1792년(정조 16) 10월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동래의 수영으로 부임, 2년의 임기를 마쳤다. 1794년(정조 18) 10월 서울에 올라가 1795년 1월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으나 그해 2월에 고향 무장현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경상 좌수사 재임 시 여러 관청에 보낸 서류 등을 수록한 『내영 정적(萊營政蹟)』을 편찬하였다. 『내영 정적』은 『부산 사료 총서』 7권으로 해제와 함께 간행되었다. 부산 및 경상남도 지역의 해안을 그린 군사 지도인 「고려 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와 압록강 주변의 지도 「청북 변성도(淸北邊城圖)」를 만들었으며, 칠원 부사 시절의 서류 기록을 모아서 편찬한 『칠원 정적(漆原政蹟)』도 남겼다.
그 밖에 족종손(族從孫) 강우만(姜宇萬)이 엮은 『물기재집(勿欺齋集)』 2권 1책이 전한다. 『물기재집』에는 강응환이 쓴 시조 「창성 감고가(昌城感古歌)」와 가사 「무호가」가 실려 있다. 「창성 감고가」는 강응환이 평안북도 창성에 이배(移配)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요동의 옛 땅을 되찾지 못하는 통분함과 애국정신이 스며 있다.
[묘소]
강응환의 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물기재집』에 고령진의 백성들이 지은 가사 「고령진민 선정가(高嶺鎭民善政歌)가 실려 있다. 고령진 첨사 강응환이 선정을 베푼 것에 감사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