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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374
한자 張應斗
영어음역 Jang Eungdu
이칭/별칭 하보(何步)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종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시조 시인
성별
대표경력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
출생 시기/일시 1913년 11월 4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생리』동인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동아 일보』 통영 지국 기자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관란」으로 입선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문장』지에 「한야보」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65년 -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 부지부장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70년 3월 17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122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통영시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학교|수학지 경상남도 통영시
학교|수학지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광역시
관련 유적 민주 공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2동 218-220지도보기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시조 시인.

[활동 사항]

장응두(張應斗)[1913~1970]는 1913년 11월 4일 경상남도 통영시 태평동 122번지에서 태어났다. 이영도(李永道)와 함께 1950년대~1960년대 부산 시조의 쌍벽을 이룬 시조 시인이자 시인으로, 호는 하보(何步)이다. ‘어디로 갈까’로 풀이되는 이 아호(雅號)는 늘샘 탁상수(卓相銖)가 지었다. 항일 투사이며 한의사였던 아버지와 통영 통제사 주치의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20살까지 한학과 한의학을 수업하였다. 8·15 광복 후 지역별로 ‘한의사 허가제’가 실시되자, 한의사 면허를 사정이 딱한 친구에게 양보하였다. 자신은 시험을 치르고 면허를 얻을 생각이었으나, 몇 차례 낙방하고 끝내 무면허 의사로 남았다.

6·25 전쟁을 계기로 부산에 정착한 장응두는 대물림 받은 비범한 한의술로 형편이 어려운 많은 이웃들과 문사들의 질병을 돌보아 주며, 별명처럼 ‘어디로 갈지 모르는’ 청빈과 부운(浮雲)의 삶을 묵묵히 걸어갔다. 1936년 동아일보사 통영지국 기자로 활동하였고, 4·19 혁명 후 경상남도 반민주행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5년 청마 유치환(柳致環)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부산문인협회] 지부장을 맡자 장응두는 부지부장을 맡았다. 이와 같은 몇 차례의 사회 활동과 직책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하였고,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량과 강직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다.

1935년 청마 유치환 등과 『생리(生理)』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초창기에 「가을」·「상심」·「밤길」·「산길」·「슬픈 그림」 등의 자유시를 동인지 『생리』에 발표하였다. 『조선 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관란(觀瀾)」이 입선되었고[1938], 「한야보(寒夜潽)」[1940]가 『문장』에 추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조에 전념하였다. 장응두는 누구의 추종도 불허할 만큼 독자적인 세계를 말없이 개척하면서 시조의 현대화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가장 뚜렷한 성공을 거둔 시조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장응두를 가리켜 모래 속에서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시인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1970년 3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유작 시조집으로 『한야보(寒夜潽)』[1972]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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