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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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正煥 |
영어음역 | Jo Jeonghwan |
이칭/별칭 | 의경(義卿),남강(南崗),조진(曺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111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자는 의경(義卿), 호는 남강(南崗). 별칭으로 조진(曺珍)이라는 이름을 썼다. 동생 조성환(曺誠煥)은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과 활동하였고, 아들 조규갑(曺奎甲)은 제헌 국회 의원을 지냈다.
[활동사항]
조정환(曺正煥)[1875~?]은 1875년(고종 12) 10월 6일 녹산 분절 마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미음동 1117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옥산제(玉山齋)에서 수학한 후 밀양에 가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에게 배웠다. 교육에 뜻을 품고 32세 때인 1906년(광무 10)에 서울로 상경하여 풍덕학교(豊德學校)를 세워 조선 역사를 강의하였고, 이후 파주에서 인성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강제 폐쇄되었다. 국권 강탈 이후 영남과 호남 각지로 다니면서 지역 유지들과 손잡고 구국 운동에 힘쓰는 한편 저술을 통해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 해방 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독립단은 의병장과 개신 유학자 등 구국 지사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경에 연호 문제를 둘러싸고 장년층과 청년층이 의견 차이를 드러내면서, 각각 주장하는 연호를 붙인 단체인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양분되어 대립하였다.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던 장년층은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隆熙)를 주장하며 박장호(朴長浩)·백삼규(白三奎)·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을 중심으로 기원독립단을 조직하였다. 공화주의를 주장하여 민국(民國)의 사용을 주장한 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金承學) 등 청년층은 민국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조정환은 민국독립단 측에 가담하여 자의부장(諮議部長)을 맡았다.
1921년에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조선 땅으로 잠입하여 경주와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에도 중국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여 항일 폭력 투쟁을 전개하는 등 계속해서 민족 해방 운동에 헌신하였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민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였고,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장자(莊子)』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27년 미국에서 이승만·안창호 등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동생 조성환[1880~1968]에게 우국의 시를 한 수 남긴 뒤 만주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시의 내용은 ‘단한일월(丹心韓日月)[나의 일편단심은 조국 하늘의 해와 달 같은데] 백골한산천(白骨漢山川)[내 몸은 중국 땅에 묻히는구나] 사각인간사(卸却人間事)[이제 인간사를 뿌리치고 정리해 버리니] 금조독립년(今朝獨立年)[오늘 아침이야말로 독립의 해로구나]’이다.
[저술 및 작품]
『병론 아세아(兵論亞細亞)』, 『동시국 변론(東時局變論)』, 『일본 대한 정책론(日本對韓政策論)』, 『한국 유신론(韓國維新論)』 등을 저술하여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69년 아들 조규갑이 창녕 조씨 재실[녹산 남강재]에 제단과 비석을 건립하였다. 1973년 조정환 구국기적비(曺正煥救國紀蹟碑)가 건립되었다. 1992년 조정환 흉상이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