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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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本人歸還 |
영어의미역 | Naturalization of the Japanese |
이칭/별칭 | 인양(引揚),귀국(歸國),귀향(歸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영호 2 |
[정의]
1945~1961년 일본의 패전에 따라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로 귀환한 일.
[개설]
일본 후생노동성의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을 계기로 당시에 해외에 거류 혹은 주둔하고 있던 일본인과 일본군이 일본으로의 귀환을 시작하여 귀환 활동이 거의 끝나는 시점인 1961년까지 총 628만 8,665명이 귀환했다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에는 한반도 38도선 이남에서 귀환한 일본인 59만 6,454명과 이북에서 귀환한 일본인 32만 2,585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귀환해 갔다. 1946년 말까지 남한에서 57만 1,765명이, 북한에서는 30만 4,469명이 일본으로 귀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국권 강탈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에 따라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많아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일본 본토와 정기 연락선으로 연결된 부산항은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한반도 상륙지가 되었다. 부산의 경우 1910년에 2만 3,900명이던 일본인의 수가 1919년 이후 3만 명을 넘겼고, 1926년에는 4만 명, 1933년에는 5만 명, 1942년에는 6만 명을 넘겼다. 한반도 거주 일본인은 식민지 조선인과의 인적 교류가 적은 가운데서 일본인 나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식민지 지배자로서의 혜택을 향유하였다.
[경과]
패전 후 일본에서 가까운 경상남도·전라남도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개별적으로 선박을 빌려 현해탄을 건너간 것을 필두로 하여 일본인 귀환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며, 연합국 군사령부에 의해 귀환 수송 체계가 정비되면서 대규모 집단 귀환이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8월 17일 구호 본부를 설치하고 귀환자 수송 업무를 시작하였다.
일찍이 8월 20일 초대형 선박 고안마루[興安丸]가 부산항에 입항하여 다음날 일본인들을 싣고 출항하였다. 이어 8월 22일에는 도쿠주마루[德壽丸] 선박이 부산항에 입항하여 24일에 출항하였다. 종전에 관부 연락선을 관할하던 히로시마[廣島] 철도국이 조선총독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연합군의 통제 이전에 임의로 귀환선을 운항시킨 것이다.
9월에 들어 점령군이 진주하면서 일본인 귀환에 대한 체계적인 원호 수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귀환자에 대한 정보 전달은 일본인세화회에 맡겼다. 부산항에는 미군정청 외사처 난민과 직원이 파견되어 미군 제40사단과 지방 군정팀과 협조하여 제1 부두 근처의 창고를 임시 수용소로 하여 원호 업무를 수행하였다.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에 따른 한반도 내 격렬한 일본인 배척 움직임은 귀환을 희망하지 않는 일본인에게까지도 귀환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문화를 배제해 온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에 의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일본인만의 공동체를 유지해 온 것도 해방된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이 더 이상 잔류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애초 미군정 당국은 일반 일본인의 잔류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한국인들의 배일 감정이 점차 심해지자 잔류자도 귀환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소유 재산에 미련이 있어 귀환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일시적으로 재산의 매매나 탁송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946년에 들어서 군정 당국은 잔류 일본인들을 적극 귀환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였다.
1월 22일 일본인세화회에 38도선 이남의 일본인은 앞으로 2주간 이내에 군정청의 직간접 사무 담당자와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귀환하도록 지시하였다. 사실상 일본인 모두에게 귀환을 지시한 것이다. 이로써 남한 거주 일본인은 1946년 2월 시점에 거의 귀환하게 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 남하하여 남한을 통과해 가거나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다가 귀환하는 일본인 여성이 있어 이들을 위한 일본인 원호 단체가 계속 서울과 부산에 남아서 활동하다가 1948년 6월에 완전히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