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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323
한자 吳德俊
영어음역 O Deokjun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 37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군인
성별
대표경력 제3 군단장
출생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44년 - 간사이대학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48년 10월 - 제5 여단 참모장으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인제 가네고갯길[군축령] 공사
활동 시기/일시 1959년 - 설악산 전투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장수대’ 건립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7월 - 남원 수해 지구 긴급 대책본부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61년 11월 - 농업협동조합 중앙회장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980년 5월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59년 5월 - 오덕준 장군 송덕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위국진충’의 휘호를 하사 받음
출생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
학교|수학지 간사이대학 - 일본 오사카[大阪]
활동지 제5 여단 - 광주광역시

[정의]

부산 출신으로 제3 군단장을 역임한 군인.

[활동 사항]

오덕준(吳德俊)은 1921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소덕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大阪] 간사이대학[關西大學]에서 주경야독하여 1944년에 수료하였다. 학도병으로 일본 본토 주둔 부대인 제48 부대에 배치되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초창기 국군에 입대하였다. 1948년 10월에 광주 주둔 제5 여단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순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오덕준은 전주-임실-남원 지구 전투, 거창 지구 전투, 양양-서림 지구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제9 사단장, 제11 사단장으로 복무하였다. 향로봉을 지키던 그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1951년 9월경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爲國盡忠 辛卯年秋 贈 吳德俊 將軍 雩南 李承晩]는 뜻의 친필 휘호를 하사받았다. 이 휘호는 바위에 새겨졌는데, 2004년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광산리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제3 군단 9사단장으로 복무할 때 심리전의 일환으로 “인민군 장병들이여 아는가!”라는 전단을 북한군 병사들에게 살포하여 투항과 귀순을 권유하였다.

휴전 후 오덕준은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파견되어 공부하고 졸업하였다. 이후 제3 군단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3 군단장 재직 시 인제읍에서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가네 고갯길 공사를 완료한 후, 이 고개 이름을 ‘군축령’[군인들이 닦은 고갯길]이라고 불렀다. 1959년 10월에는 6·25 전쟁 때 치열했던 설악산 전투를 회상하며 전몰장병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장수대’를 건립하였다. 1960년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의 현대식 교육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61년 7월 오덕준은 남원 수해 지구 긴급 대책본부장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1961년 11월에는 농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국수출무역공사를 설립하여 각종 산물을 국제 시장에 수출하여 외화 획득에 이바지하였다. 제일산업회사 지사 등 다수의 기업체를 운영하였고, 대한재향군인회 부회장으로도 재임하였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1980년 5월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58년 제3 군단장 소장 재임 시 지역 복구 사업에 병력을 동원하여 주택을 지어주는 등 다각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그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1959년 5월에 ‘오덕준 장군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송덕비는 인제군 남면 소재지에서 인제, 속초 쪽으로 가는 국도 제44호선의 우측 편 남전 약수터 입구 맞은편인 강원도 인제군 남면 남전1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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