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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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派兵 |
영어의미역 | Dispatch of Troops to Vietnam |
이칭/별칭 | 월남 파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병윤 |
[정의]
1964년~1973년 부산항 부두를 통해 한국군을 베트남으로 파병하고 철수한 일.
[경과]
1960년대 초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미국 정부와 협의하여, 전쟁 중인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1964년 9월 11일 부산항에서 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졌다. 1차 파병 부대는 의무 장교와 위생병, 간호 장교 등 130명으로 구성된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모두 14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1일에 걸친 여정 끝에 9월 22일 사이공에 첫발을 디뎠다.
1965년에는 비전투 병력 2,000명을 파견키로 한 정부의 결정에 따라 3월 12일에 후방 군사 원조를 목적으로 비둘기부대를 부산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8월 13일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전투 사단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 통과되면서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각각 부산항 부두를 출발하였다. 부산항을 통해 베트남으로 파병된 부대는 이들 외에도 군수 지원 목적의 십자성부대, 군수 물자 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있다.
1966년 들어 미국이 전투 부대의 추가 파병을 요청해오자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부산항에서 파병되었다. 이로써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모두 4만 8,000명에 이르렀고,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이 휴정 협정을 시작하여, 1971년 들어서 미군을 비롯한 파병국의 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역시 1971년 11월 6일 베트남 정부와 파월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데 합의하고, 12월에 1만여 명의 청룡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3년 3월 철수를 완료하였다.
[결과]
8년 동안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모두 6차례에 걸쳐 34만 명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부산은 한국군 파병과 철수의 관문으로서, 베트남 참전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획득한 수 억 달러의 외화는 1960, 70년대 경제 개발의 자본으로 제공되었으며, 한국군의 군 장비 현대화에도 큰 몫을 하였다. 아울러 베트남 파병은 미국과 한국의 군사적 관계를 증진시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일방적 요청에 따른 명분 없는 파병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통일 베트남과의 외교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으며, 파병 군인 가운데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생기는 후유증을 남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