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2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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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新羅時代-對中交流 |
영어의미역 | Exchanges with China during the Unified Silla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권덕영 |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때 해양을 이용한 부산과 중국과의 교류.
[개설]
한반도 동남쪽 바다에 인접한 부산은 일찍부터 해양을 통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왜인전(倭人傳)’에 따르면, 지금의 김해 지역에 있던 구야국(狗邪國)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 반드시 거치는 바닷길의 요지였다고 한다. 김해 지역이 고대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해상 교통로의 요지였다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부산 지역 역시 그에 버금가는 바닷길의 요지로 활용되었다. 그 예로 통일 신라 시대의 해양 제사처[사독(四瀆)]의 하나인 형변 부곡(兄邊部曲)이 부산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대중국 교통로]
삼국 시대부터 해상 교통의 요로에 위치한 부산 지역은 남북국 시대에도 여전하여, 통일 신라의 대일본 교류는 물론 대중국 교류에서도 긴요한 지역이었다. 통일 신라의 대중국 교통로는 서해안의 당은포(唐恩浦)와 영산강 하구의 회진(會津)을 기점으로 황해를 횡단하는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서해안 포구로 가는 데는 육로와 해로가 있다. 그 중 해로를 통해 서해안 포구로 가려면 울산항을 출발하여 부산 지역과 김해, 사천 등을 거쳐 남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하여 회진 혹은 당은포에 다다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륙에서 낙동강 수로를 따라 부산 지역으로 내려와 남해안을 따라 서해안 항구로 나아갈 수도 있다.
837년(희강왕 2)에 흥덕왕(興德王)이 죽은 후에 일어난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화를 피하여 처자식을 데리고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와 양산시 일대를 흐르는 낙동강 하류에 있던 나루 황산진(黃山津)에서 배를 타고 완도의 청해진으로 갔다. 그들은 부산 지역을 거쳐 대중 교통로를 이용하여 남해안을 따라 서해안으로 항해하였음이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통일 신라 시대 때 부산 지역은 신라와 중국으로 오가는 선박들이 거치는 해로의 중간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는 김해와 진주 지역과는 달리 중국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과 직접 교류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