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59
한자 金喆壽
영어음역 Gim Cheolsu
이칭/별칭 춘재(春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3·1동지회 이사장
출생 시기/일시 1896년 5월 4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부산상업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일본 게이오대학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18년 1월 27일 - 조선 학회 간사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8년 9월 - 조선청년독립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8일 - 2·8 독립 선언 대표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26일 -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 금고형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월 9일 -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부산상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15일 - 양산청년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2일 - 조선청년회연합회 상임 위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조선물산장려회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시대일보사 경제부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신간회 양산지회 설립 준비 위원 및 검사 위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양산에서 은둔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미군정 입법 의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자유민보사 사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제2대 경상남도지사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대통령 표창 수상
몰년 시기/일시 1977년 5월 18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건국 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 2·8 독립 선언
출생지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학교|수학지 사립기장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20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구포구명학교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 새싹1길 14
학교|수학지 부산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학교|수학지 게이오대학 - 일본 도쿄
활동지 재동경 한국유학생학우회 - 일본 도쿄
활동지 조선청년독립단 - 일본 도쿄
활동지 부산상사 - 부산광역시
활동지 양산청년회 - 경상남도 양산시
활동지 신간회 양산지회 - 경상남도 양산시
활동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 -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활동지 경상남도청 -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
활동지 자유당 경상남도당 -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지도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행정가.

[가계]

본관은 경주. 호는 춘재(春齋). 아버지는 김상형(金商炯)이고, 어머니는 김월봉(金月鳳)이다. 김상형은 양산의 부농이었다. 동갑인 이복순(李福順)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철수(金喆壽)[1896~1977]는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장에 살던 매형인 박인표(朴仁杓)가 경영한 사립기장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가 동래군 좌이면 구포리로 이사하자,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고, 7월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재동경한국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였고, 신익희·이광수·장덕수·최팔용·김도연·윤현진(尹顯振)·송계백·백관수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으면서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8년 조선 학회에서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최팔용·김도연·이광수·송계백 등과 함께 100여 명의 유학생을 규합하여 비밀 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2·8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2·8 독립 선언에 대표 위원으로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6월 26일에 열린 제2심에서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 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9일 출옥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박인표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를 정리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상사라는 무역 회사를 열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 무렵 발흥하던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7월 양산청년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총회에서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가하여 경리부원이 되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및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무렵 안재홍(安在鴻)의 권유로 시대일보사의 경제부장을 맡았고, 1928년 3월 신간회 양산지회의 설립에 준비 위원과 검사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김철수의 영향으로 신간회 양산지회의 중심 과제는 협동조합 운동이 되었다. 1936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 참여하였고,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자유민보사 사장을 지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입법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47년 제2대 경상남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을 지내고, 1960년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4월 혁명을 맞았다. 이후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노인진흥회를 결성하였으며, 3·1동지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7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