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15
한자 中二洞靑沙浦堂山祭
영어의미역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 in Jung2-dong Cheongsapo
이칭/별칭 골매기 할매 당산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594-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류경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간 신앙|동제
의례시기/일시 음력 1월 3일 9시
신당/신체 제당|제단|위패|한지로 만든 성주 신체
시작 시기/일시 1700년 무렵연표보기 -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0년 10월 23일 - 제당 상량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2월 8일 - 제당 상량
의례 장소 청사포 당산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594-1지도보기
의례 장소 산신당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594-1지도보기
의례 장소 거릿대 제단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594-1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청사포 마을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중2동 청사포 당산제는 음력 1월 3일 9시 무렵에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2동 594-1번지에 있는 제당에서 1년에 한 번 김씨 할머니의 정절을 기리고 동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골매기 할매 당산제’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청사포 당산은 청사포 마을 남쪽의 해안 도로에 자리하고 있다. 청사포 마을에서는 ‘골매기 할매’인 김씨 할머니를 당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청사포 마을에는 김씨 할머니가 당산신이 된 설화[지명 유래담]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00년 무렵 청사포 마을이 생길 당시에 이 마을에는 김씨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김씨 할머니의 남편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배가 파선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매일 바닷가의 소나무[망부송(望夫松)]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수십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는 김씨 부인을 애처롭게 여긴 용왕이 푸른 구렁이를 보내 용궁으로 안내하여 남편과 상봉시켰으나, 남편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그 뒤 김씨 할머니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 할머니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골매기 할매’로 좌정시켰다. 그리고 할머니의 애처로운 넋이 서려 있는 망부송 아래에 당집을 지어 할머니를 제사하게 되었다.

청사포라는 마을 이름은 골매기 당산 할매와 관련된 푸른 구렁이[靑蛇]에서 유래하였으나, 1920년 무렵 마을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뱀 사(蛇)자를 모래 사(砂)자로 바꾸어 한자를 개명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현존하는 제당은 1970년에 수리·상량하였는데, 2002년에 다시 상량했다. 제당의 대지 면적은 231㎡[70평]에 건물 면적은 8.3㎡[2.5평, 앞면 310㎝, 옆면 268㎝]이다. 동남향을 하고 있는 이 제당은 기와 맞배지붕에 가운데 용마름과 양쪽 장마루를 높이 쌓아 멋을 부려 놓았다. 그리고 시멘트 블록 벽에 두 짝의 여닫이 나무문이 달려 있다.

제단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冂’형이다. 가운데 제단[앞면 258㎝, 옆면 42㎝, 높이 83㎝]에 ‘현동조비김해김씨신위(顯洞祖妃金海金氏神位)’라는 위패[높이 24㎝, 폭 10㎝, 두께 2㎝]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양쪽 벽에 제단[앞면 170㎝, 옆면 49㎝, 높이 83㎝]이 붙어 있는데, 왼쪽은 성주 제단, 오른쪽은 세존 제단이다. 이들 제단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제당 안의 서쪽 벽에는 한지로 된 성주 신체[가로 12㎝, 세로 19㎝]가 붙어 있다.

제당의 주변에는 블록 담장이 둘러 있고, 그 안에는 부산광역시 보호수인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있는데, 이 소나무는 김씨 할머니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아래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바위가 있었으나, 해변 도로가 개설되면서 철거되는 바람에 망부석과 제단은 사라지고 없다. 제당에서 북쪽으로 2.1m 거리에는 산신제를 지내는 ‘산신당 당집’이 있다. 건물 면적은 0.7㎡[0.2평, 앞면 91㎝, 옆면 80㎝, 높이 92㎝]이며, 시멘트 네모 지붕에 블록 벽으로 문은 없다.

또한 제당으로부터 동쪽으로 400m 떨어진 해변가의 횟집 앞에는 거릿대장군제를 지내는 ‘거릿대 제단’이 위치하고 있다. 제단은 4.3㎡[13평, 앞면 137㎝, 옆면 67㎝, 높이 6㎝] 가량의 시멘트 구조물로 동남향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옛날 걸신·잡신들을 모시던 신역이었다. 거릿대 제단을 만들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다. 즉, 마을이 생기고 나서 어느 해인가 앞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는데, 파도에 시신이 밀려와 지금의 신역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첫 시신을 걸신·잡신의 우두머리로 칭하고는, 마을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기를 염원하면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고 그를 손장군(孫將軍)이라 칭하고, 나무를 깎아 Y형의 거릿대[굵기 27㎝, 높이 75㎝]를 세우고 제단도 마련하였다.

그 옆에는 화강암에 ‘손공장군비(孫公將軍碑)’라고 새긴 비석[높이 54㎝, 폭 24㎝, 두께 8㎝]도 동남향으로 세웠다. 2003년 제14호 태풍 매미의 급습으로 비석이 부러져 현재는 오석(烏石)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는데, 크기는 전과 동일하다. 이전의 화강암 비석도 함부로 처리할 수 없어 없애지 않고 오른쪽에 기대어 놓았다.

[절차]

중2동 청사포 당산제를 주관하는 제관을 ‘제주’라고 칭한다. 제관은 본래 섣달 그믐날에 마을 주민들이 투표하여 뽑았으며, 제관에 대한 보수는 없다. 그러나 2011년 현재는 통장이 제관을 맡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 제의를 주도하지는 않고, 송정동의 고려암 스님이 와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제주인 통장은 당산을 정돈하고, 제사 비용을 거두어 절에 의뢰하는 등 제의와 관련된 일들을 관리할 뿐이다.

제의의 회수와 날짜도 과거에는 해마다 1년에 3회[음력 1월 3일, 6월 3일, 10월 3일 자정] 당산제를 지내 왔으나, 2011년 현재는 1년에 1회[음력 1월 3일 9시]로 바뀌었다. 또 제의 경비도 과거[2005년 조사 당시]에는 마을의 어촌계에서 부담하였으나[약 50만 원], 2011년 현재는 마을에서 각 가정마다 추렴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약 100만 원 정도가 소요되고 있다.

제물은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이 밥, 국, 떡, 나물, 포(脯), 과일 등을 진설하는데, 현재는 고려암에서 준비하므로 육류는 쓰지 않는다. 제의의 절차도 기제사의 일반적인 순서와 같다. 청사포 당산제는 본래 ‘산신제→ 본당제[골매기+세존+성주]→ 거릿대장군제→ 망부석제’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나, 현재는 망부석이 없어졌기 때문에 망부석제만 생략한다.

제의에 관한 금기 중에는 특히 제관에 관한 금기가 다수 전해진다. 제관은 제의 3일 전부터 제의 후 1주일간 금기를 지키는데, 출산·혼사·초상 등의 부정한 곳에는 출입하지 않고, 부부간의 잠자리도 피하는 등 몸가짐을 조심한다. 현재는 스님이 제의를 베풀고 있으므로 제관에 대한 금기는 사라졌으며, 통장과 노인회 회장을 비롯한 몇몇의 인원이 제의에 참석하여 음복을 하는데, 음복한 이들은 대체로 음력 2월까지는 금기를 지킨다.

[부대 행사]

과거에는 중2동 청사포 당산제를 지내고 난 다음날 마을 회관에서 동네 어른들이 모여 음복을 하고, 아울러 동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당산제를 지낸 제물을 절에서 일부 가져가고, 나머지는 노인정에 가져가서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마을 회의도 하지 않는다.

[현황]

중2동 청사포 당산제의 횟수가 줄고, 제관을 맡기를 꺼려하여 제의 전반을 스님에게 맡기고 있는 점 등 여러 면에 걸쳐서 제의가 축소·간편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