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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14
한자 李安訥
영어음역 Yi Annul
이칭/별칭 자민(子敏),동악(東岳),동엄(東广),동곡(東谷),문혜(文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광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덕수
대표관직 동래 부사|좌부승지
출생 시기/일시 1571년 6월 21일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정시 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형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예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4년 - 충청도 순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청백리에 선정, 정려됨
몰년 시기/일시 1637년 3월 29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37년 3월 29일 - 숭록대부 좌찬성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
추모 시기/일시 1663년 10월 8일 - 시호를 받음
출생지 한양 서리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한양 -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3가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묘소|단소 해미현 모산리 -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사관리
사당|배향지 구산서원 -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사당|배향지 향현사 -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증조 할아버지는 용재 이행(李荇)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 이필(李泌)이다. 친아버지는 진사 이형(李泂)이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인조(仁祖) 대에 대제학을 지낸 이식(李植)이 오촌 조카이다.

[활동 사항]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장원 급제했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592년(인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와 강화도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1599년(선조 32)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지내고, 1601년(선조 34)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성균관 직강을 거쳐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 지방에 나갔다. 이후 예조 판서, 단천 군수, 1607년(선조 40) 홍주 목사를 지냈다.

1608년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안눌은 동래 부사 재임 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부산 지역을 복구하고 민심을 다독이는 데 힘썼다. 25의용단(二十五義勇壇)[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을 마련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이 수영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리자 수군과 성민들이 목숨을 바쳐 왜군과 싸웠다. 25의용단은 이때 순절한 25명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또 범어사에 자주 찾아가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시를 짓고, 큰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과 시문 화답을 하였다.

1610년 담양 부사, 1613년(광해군 6) 경주 부윤, 1615년 호조 참의 겸 승문원 부제조, 동부승지, 좌부승지 1617년(광해군 9) 예조 참의, 1618년 강화 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강화도 유수, 1631년 형조 참판, 함경도 관찰사, 1633년(인조 11) 예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 1634년 충청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혀 효행 정려를 받았으며, 숭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어서 형조 판서 겸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안눌은 시문을 잘 지었다.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다. 시를 지을 때는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았으며, 4,379수의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 「사월 십오일(四月十五日)」은 임진왜란의 피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시다. 매년 4월 15일이 되면 동래성의 집집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은 사연을 듣고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들의 행적을 「행하 유감」이라는 시에 담았다.

이안눌범어사의 고승과 교유하여 40여 수의 시를 남겼다. 동래 부사를 그만둘 즈음에 무더위를 피해 큰스님인 혜정(惠晶)의 방에 거처하면서 빼어난 시 두 수를 지어 바위에 새겼는데, 청련암 앞 바위 글씨가 그것이다. 이안눌은 글씨도 잘 썼다. 이안눌의 작품은 26권으로 된 『동악집(東岳集)』에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내산록(萊山錄)」[권8]은 동래 부사 재임 시 쓴 시문과 문서 기록을 모은 것이다.

[묘소]

이안눌의 묘는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사관리[옛 지명은 충청도 해미현 모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뽑혀 효행 정려를 받았고, 숭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1637년 3월 29일 숭록대부 좌찬성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1663년 10월 8일 문혜(文惠) 시호를 받았으며 구산서원[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과 향현사[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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