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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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奧村圓心 |
영어음역 | Okumura Ensin |
이칭/별칭 | 오촌원심(奧村圓心)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1가 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인택 |
[정의]
개항기 동본원사 부산별원에서 활동한 일본의 포교승.
[활동 사항]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1843~1913]은 1943년 일본 규슈[九州] 사가 현[佐賀縣] 가라쓰[唐津]에서 태어났다. 1876년에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이 개항되자, 오쿠무라 엔신은 일본 정부와 교단 본부인 동본원사(東本願寺)의 명을 받고 히라노 케이스이[平野惠粹]와 함께 1877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오쿠무라 엔신은 1588년 일본 본원사(本願寺) 10대 주지 교뇨쇼닌[敎如上人]으로부터 황금불과 아미타여래 외 24개 품목을 받고 조선 포교를 위하여 부산에 건너와 고덕사(高德寺)라는 절을 세운 오쿠무라 카몬노스케[奧村掃部之介]의 후손이었다.
오쿠무라 엔신은 1877년 11월 5일 본원사 출장소(本願寺出張所)[1878년 12월 ‘동본원사 부산별원’으로 개칭]를 설치하였다. 이후 종교와 교육 사업 등을 통해 개항 당시의 조선에 일본 세력을 부식시키는 데 힘썼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설립한 후에 오쿠무라 엔신은 그 산하에 한어학사(韓語學舍)[1878년]를 개설하였는데, 이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할 개교사(開敎師)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또 일본에서 온 어학 연수생들의 뒷바라지에도 힘쓰고, 일본의 문명개화에 관심을 보인 조선 승려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으로 밀항하게끔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개화파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데 깊이 관여하여 지원과 주선을 아끼지 않았다. 즉, 당시 조선의 조야 인사들과 일본 정부를 이어주는 창구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았을 뿐 아니라, 때로는 일본으로 도항하는 데 필요한 정치 자금의 대여 등 직접적인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오쿠무라 엔신의 『조선 포교 일지(朝鮮布教日誌)』에는 1890년 11월 11일자에 “동인에게 교토에서 금 천 엔을 빌려줄 것을 본산에 상신하였고, 또 원산 설교장으로부터 삼백 엔을 대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즉, 오쿠무라 엔신의 권한 내에 있는 동본원사 원산별원의 경비로 300엔을 대여함은 물론, 일본 체류와 관련하여 본산이 이동인 등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 줄 것을 상신한 것이다. 이러한 오쿠무라 엔신의 조선 포교 활동에 대해 본국 정부는 물론, 영사 업무 등을 통해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당시 한국에 기항한 군함에 이동인을 태워 보낸다거나, 포교 활동과 관련한 업무에 영사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일일이 보고와 대책을 지시하는 등 상당히 유기적이면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오쿠무라 엔신은 1877년부터 약 5년간에 걸쳐 부산·원산·인천에 별원을 세워 일본인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벌이는 한편, 조선인에 대한 포교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후 귀국하였다가, 1897년 동본원사로부터 조선 포교 활동의 강화를 명받자,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와 함께 전라남도 광주를 새로운 포교 활동지로 정하고 다시 한 번 조선으로 건너왔다. 오쿠무라 이오코는 당시 귀족원 의장 코노에 아쯔마로[近衛篤磨], 외무대신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등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1898년 9월 양잠, 농업 기술 개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오쿠무라실업학교[奧村實業學校]를 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애국부인회의 창설을 주도하는 한편, 일본으로 망명 와 있던 김옥균, 박영효 등에 대해서도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오쿠무라 엔신과 오쿠무라 이오코는 한반도 침탈 초기부터 동본원사의 조선 포교 활동을 통해 당시 양국의 정치·외교의 장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였다. 이는 서구 열강들이 군함을 앞세워 개항을 하게 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일본 역시 그대로 답습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술로 『조선 포교 일지(朝鮮布教日誌)』[1877]가 있다.
[묘소]
묘소는 일본 사가 현[佐賀県] 카라츠 역[唐津驛] 근처에 있는 부산해 고덕사(釜山海高德寺) 경내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