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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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𩡘 |
영어음역 | Yi Ha |
이칭/별칭 | 면여(勉餘),양계(陽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이고, 출생지는 경상북도 김천(金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귀(李纘貴)이고, 할아버지는 이윤무(李胤武)이며, 아버지는 이상규(李尙規)이다. 어머니는 덕산황씨(德山黃氏)로 황하징(黃河徵)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김희장(金喜長)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황후경(黃後瓊)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활동 사항]
이하(李馥)[1626~1688]는 1654년(효종 5) 식년시 문과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1658년(효종 9) 안동교수(安東敎授)를 시작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등을 지내고, 1661년(현종 2) 중직(中直)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1663년(현종 4) 만경현감(萬頃縣監)으로 백성을 잘 다스려 포계(褒啓)[관찰사나 어사가 고을 수령의 선정을 임금에게 아룀]를 입었으나 일 년도 안 되어 그만두고 두문불출한 채로 독서에 전념하며 『대동유선록(大東儒先錄)』을 편찬하였다.
1675년(숙종 1) 호조좌랑(戶曹佐郞), 예빈시정하(禮賓寺正夏),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1676년(숙종 2) 7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였다. 당시는 왜관을 옮겨 달라는 일본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초량 왜관 신축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1677년(숙종 3), 두모포 왜관에 불이 나 동쪽 행랑(行廊) 20칸이 타고 선창(船倉)까지 번져 쌓여 있던 곡식 340여 석이 타고 왜인이 사망하였다. 이에 이하는 조정에 공미(貢米)를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밀무역 대가로 왜채, 즉 노부세(路浮稅)[노점상의 자릿세]를 받은 윤금선 등 세 명의 조선인을 효시(梟示)하였다. 이하는 또 초량 객사를 고쳐 짓고, 동래부사가 일본의 사절에게 잔치를 베푸는 연향대청(宴饗大廳)도 넓혔다.
왜관을 초량으로 이전한 1678년(숙종 4) 조정에서는 왜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7개 항목으로 된 무오절목(戊午節目)[戊午移館後節目]을 마련하였다. 이전의 절목은 밀무역 근절을 위한 대책과 이에 따른 동래부와 동래부사의 역할, 밀무역자에 대한 처벌책 등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무오절목에는 처음으로 조선과 일본의 공동 처벌 조항이 들어갔다. 조시약조(朝市約條)라고도 하는 무오절목은 1683년(숙종 9) 마련된 계해약조(癸亥約條)의 골격이 되었다. 이하는 1679년(숙종 5) 2월 동래부사 임기를 끝마치고 그해 동부승지(同副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나 반대파의 무고(誣告)로 함경도 삼강(三江)에 유배되었다. 1686년(숙종 12)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옮겨져 1688년 4월 8일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암(松庵) 이구(李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저서로는 『대동유선록』과 『양계집(陽溪集)』이 있다.
[묘소]
이하의 묘는 충청남도 금산(金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