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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102
한자 李世載
영어음역 Yi Sejae
이칭/별칭 지숙(持叔)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승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용인
대표관직 동래 부사|형조 참판
출생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69년 -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알성시 을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96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98년 -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06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08년 - 이세재 불망비 건립
묘소|단소 이세재 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이석리
선정비 가산산성 -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지숙(持叔). 증조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이사경(李士慶)이고, 할아버지는 좌승지에 추증된 이후지(李後地)이며, 아버지는 나주 목사로 호조 참판에 추증된 이하악(李河岳)이다. 어머니는 북청 이씨(北靑李氏)로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딸이고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다. 양아들은 이의룡(李宜龍)이다. 이의룡도 아들 없이 일찍 죽어 일가인 이보철(李普喆)을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이세재(李世載)[1648~1706]는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급제하고, 1694년(숙종 20) 알성시(謁聖試) 을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경기도 도호부사 등을 거쳤다. 1696년(숙종 22)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일본과의 교역 및 풍속을 해치는 교간 사건 등을 엄정히 처리하였다. 울릉도 국경 분쟁 및 교역 문제에 불만을 품은 관왜(館倭)[왜관 관리자] 18명이 왜관을 뛰쳐나온 사건이 발생하자 매일 왜관에 공급하던 물자를 끊기도 하였다.

부산에 떠내려온 왜인의 시신을 거두어 간다는 명목으로 비공식 차왜(差倭)[일본의 사신]가 자주 방문하여 왜관에서 접대하는 일이 늘어나자 이세재는 ‘왜인의 시신은 표민 출송선(漂民出送船)이나 세견선(歲遣船) 편에 보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려 조정의 허락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쓰시마[對馬]는 예정에 없는 차왜를 파견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세제가 동래 부사로 있을 때는 왜인들이 함부로 계책을 꾸미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세재는 또한 청렴하고 엄정하며 위엄이 있어 동래부 100년 이래 제일가는 명관(名官)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범어사 중건을 위해 시주를 하기도 하였다.

1698년(숙종 24) 경상 관찰사가 되어서는 전정(田政)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왜관을 수리하였으며, 경상북도 칠곡에 있는 가산산성(架山山城)의 외성(外城)을 쌓았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병기(兵器)를 정비하는 등 국방에도 힘을 쏟았다. 이후 예조 참의, 평안도 관찰사, 대사간, 도승지, 한성부 우윤, 경기 관찰사, 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1706년(숙종 32)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기도 광주의 우산(牛山)에 장사를 지냈고, 부인 전의 이씨를 합장하였다. 이세재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이석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가산산성의 외성을 쌓은 공을 기려 1708년(숙종 34) 지역 주민들이 성안에 이세재 불망비[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남원리]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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