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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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夏 |
영어음역 | Yi Ha |
이칭/별칭 | 하경(夏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하경(夏卿). 증조 할아버지는 이장형(李長亨)이고, 할아버지는 이유(李琉)이며, 아버지는 이유담(李維聃)이다. 어머니는 유양증(兪養曾)의 딸이고, 부인은 민광윤(閔光尹)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하(李夏)[1636~?]는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 병과에 7위로 급제하였다. 1661년(현종 2) 승정원 주서(主書)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역임하였다. 1670년(현종 11)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부교리, 사간 등을 지냈고, 1671년(현종 12) 제주 선유어사(濟州宣諭御使)에 임명되어 제주도에 곡식 종자와 식량, 포목을 싣고 가 도민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1672년(현종 13) 2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이하의 동래 부사 임명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하가 전임 동래 부사 정석(鄭晳)과 사돈을 맺었기에 허적(許積)이 상피법(相避法)[친인척끼리 같은 부서에 있거나 송사를 맡거나 시험 감독을 금지함]에 어긋난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은 명을 거두지 않았다.
현종은 이하를 동래 부사에 임명한 후 왜관을 엄격히 통제하고 단속해 줄 것을 신신당부하면서 “집 천 칸을 짓고, 10년을 머무른다고 해도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왜의 사절에게 분명히 밝히라.”고 주문하였다. 이에 이하는 “동래부의 관속들이 왜관의 일본인들과 친밀하여 조선의 정보가 새 나갈까 걱정스럽다.”고 답하였다.
17세기 후반 일본 쓰시마[對馬] 측은 매우 강경하고 끈질기게 왜관의 이전을 요구해 왔다. 두모포 왜관의 부두가 좁고 파도가 높아 위험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하가 동래 부사로 재임할 때도 평성령(平成令)을 대표로 한 250여 명의 이관차왜(移管差倭) 일행이 왜관 이전을 요구하며 두모포 왜관에 머물고 있었다.
왜의 요구를 강경하게 물리쳐 왔던 조선은 1673년(현종 14) 9월 초량에 새 왜관을 짓기로 함으로써 30여 년을 끈 왜관 이전 교섭이 마무리되었다. 이하는 1674년(현종 15) 6월 임기가 끝나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