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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80
한자 李元鎭
영어음역 Yi Wonjin
이칭/별칭 승경(昇卿),태호(太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문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여주
대표관직 동래 부사|승지
출생 시기/일시 1594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44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5년 9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647년 - 승지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승경(昇卿), 호는 태호(太湖). 아버지는 이지완(李志完)[1575~1617]으로, 시문에 능하여 1606년(선조 39)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 이호민(李好閔)·허균(許筠) 등과 접반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초기에 승지와 대사간을 지내고,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를 다스려 병조 판서에 올랐다.

[활동 사항]

이원진(李元鎭)[1594~1665]은 1615년(광해군 7) 생원으로서 인목 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등과 함께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교리, 홍문관 부수찬, 사헌부 장령,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1644년(인조 22) 교리로 있을 때 임금의 명으로 두만강 국경을 넘어와 경흥·경원·온성 등지에 침입, 횡포를 부리던 여진인을 쫓아낼 방안을 강구하였다. 같은 해 동래 부사로 부임하여 대일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천주교를 금하고 신자들을 탄압하던 중이었다. 1645년(인조 23) 쓰시마[對馬]의 도주가 등지승(藤智繩)을 차왜(差倭)로 하여 ‘중국 텐진(天津)에서 천주교인들이 배를 타고 조선의 해로를 지나 일본으로 오려고 하니 조선의 진(鎭)에서 수색하여 체포해 달라.’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동래 부사 이원진에게 보내 왔다. 이와 함께 쓰시마 도주가 조선의 근해를 직접 둘러보고 일본 관백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조선 섬들의 이름과 지도를 부탁하고, 조선의 수군절도사가 이 일을 관장하여 모든 포구에 외국 배가 있는지 살펴 문서로 작성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원진은 1645년 9월에 병으로 동래 부사에서 물러나 얼마 후 제주 목사로 옮겼다. 이때 남만인(南蠻人) 30여 명이 제주에 표류해 오자 이들을 잡아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1647년(인조 25) 승지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저술한 『탐라지(耽羅志)』는 가장 오래된 제주 읍지로, 자연환경부터 인물, 시문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특징을 상세히 적어 17세기 중엽의 제주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탐라지』는 또한 이후에 나온 제주도에 관한 저서들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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