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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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元禎 |
영어음역 | Yi Wonjeong |
이칭/별칭 | 사징(士徵),귀암(歸巖),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징(士徵), 호는 귀암(歸巖). 할아버지는 유학자 이윤우(李潤雨)이고, 아버지는 이도장(李道長)이며, 어머니는 김시양(金時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원정(李元禎)[1622~1680]은 1648년(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검열, 교리를 거쳐 1660년(현종 1) 사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661년 4월에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1661년 12월 쓰시마[對馬]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과 민가 2,000여 채가 불타 쓰시마 도주가 사신을 보내 구호 물품을 요청해 왔다. 이에 이원정은 조선 땅에 기근이 심해 도울 여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정말로 이원정은 흉년으로 굶주리는 동래 지역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진휼하였다.
1662년(현종 3) 7월 전 임지인 장성에서 비축된 군량을 축낸 혐의로 파직되어 의금부에 구금되었으나 대질 심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풀려났다. 같은 해 11월 의주 부윤으로 나갔다가 장성에서 관곡(官穀)을 함부로 썼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670년(현종 11) 사은사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673년 도승지, 1677년(숙종 3) 대사간과 형조 판서를 지냈다. 1680년(숙종 6) 이조 판서일 때 서인이 남인 세력을 쫒아낸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이원정은 관직을 빼앗기고 초산으로 귀양을 가다가 조정으로 다시 불려가 장살당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귀암 문집(歸巖文集)』, 『경산지(京山志)』, 『완부 결송록(完府決訟錄)』이 있다.
[묘소]
이원정의 묘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죽은 지 9년 후인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한 뒤 신원되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에도 권력 판도에 따라 여러 차례 추탈(追奪)[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을 없앰]되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에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1903년(고종 40) 칠곡 지역 유생들이 석전리에 재실인 경암재(景巖齋)를 지어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