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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78
한자 李壄
영어음역 Yi Ya
이칭/별칭 중선(仲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문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완산
대표관직 동래 부사|도승지
출생 시기/일시 1648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91년 - 알성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승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97년 -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03년 4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05년 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06년 -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13년 - 예조 참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16년 - 도승지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719년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중선(仲先). 증조 할아버지는 종실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이고, 할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어가를 호종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오른 구천군(龜川君) 이수(李睟)이며, 아버지는 봉산군(蓬山君) 이형신(李炯信)이다. 어머니는 한득일(韓得一)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야(李壄)[1648~1719]는 1691년(숙종 17)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694년 승지가 되었다. 1697년(숙종 23)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 시 고성(高城)의 굶주린 형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다가 함께 죽은 사건으로 추궁을 당했다. 이후 승지, 동지부사, 형조 참판, 승지를 지내고 1703년(숙종 29) 4월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동래 부사 재임 시 대일 외교 업무에 힘을 쏟았다. 평의방(平義方)이 일본 본토에서 쓰시마[對馬]로 돌아와 도주(島主)에 오르자 조선에서 문위행(問慰行)을 보내 축하하였다. 전 쓰시마 도주 평의진(平義眞)이 죽었을 때는 한천석(韓天錫), 박세량(朴世亮) 등으로 구성된 조문단을 파견하였는데, 배가 난파하여 113명이 죽은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조선 측은 평의진의 관명으로 된 도서(圖書)[예조에서 쓰시마 도주 등에게 지급한 도장으로, 서류에 이 도장이 찍혀 있어야 부산에 상륙하거나 교역을 할 수 있음]와 아명(兒名) 도서[쓰시마 도주의 아들이 어렸을 때 아명으로 받아 가던 도서]의 환수 문제로 이야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1704년(숙종 30) 11월에는 평의방을 만나고 돌아온 한후원(韓後瑗)을 통해 일본의 사정을 자세히 듣고, 에도[江戶]의 막부가 군대를 장기도(長崎道) 인근으로 옮긴다는 소식 등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연해(沿海)의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단단히 대비하도록 일렀다.

1705년(숙종 31) 1월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나고,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06년 대사간, 경상 관찰사를 거쳐 1713년(숙종 29) 예조 참판이 되었다. 1716년(숙종 42) 도승지일 때 조정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도록 세자의 위호(位號)를 서둘러 제정해야 한다는 연명 상소를 올리고, 1717년 사직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22 인명 오탈자 수정 이수린(李守麟) -> 이종린(李宗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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