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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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民寏 |
영어음역 | Yi Minhwan |
이칭/별칭 | 이장(而壯),자암(紫巖),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문종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아버지는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대에 벼슬을 한 강원도 관찰사 이광준(李光俊)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宣務郞) 신권(申權)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민환(李民寏)[1573~1649]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600년(선조 3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검열,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을 거쳐 1603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 수령의 업무와 민정을 살폈다. 1618년(광해군 10) 청의 공격을 받은 명나라가 원군을 청해 오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 부차(富車)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청의 항복 요구를 물리치고 17개월 동안 잡혀 있다가 1620년(광해군 12)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민환은 의주에서 지낼 때 박엽(朴燁)의 무고(誣告)로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시 한양으로 올라와 이괄(李适)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 때 임금을 호종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영남 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1638년(인조 16) 7월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1639년 7월 차왜 등지승(藤智繩) 등이 조흥(調興) 및 현방(玄方)의 송사(送使)를 복구하는 일로 와서 요청하였다. 이때 현방을 대신해서 사찰 이정암(以酊菴)의 장로 3인이 교대로 주관함에 따라 도서(圖書)를 주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서를 주조하여 조흥을 대신해서 쓰시마 도주의 장관(將官) 3인이 돌아가면서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조흥과 현방의 송사는 이들이 을해년[1635년]에 죄를 지어 폐지되었으므로, 앞으로 사선(使船)을 보낼 때 을해년 몫부터 계산하여 보낼 것을 품계하였다. 이에 이정암의 도서를 주조하여 보내는 일은 허락하되, 을해년 몫부터 계산하여 보내지 않는다고 명을 내렸으나, 같은 해 9월에는 을해년 이후의 미수년조(未收年條)를 특별히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정암’의 명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민환은 1639년 9월에 어사의 장계로 파면되었다.
[학문과 저술]
청나라 포로가 되어 17개월 동안 억류되었다가 귀국하게 된 경위와 그에 대한 변론을 담은 「자건주 환후 진정소(自建州還後陳情疏)」와 누르하치의 통솔 하에 있던 건주 지역 만주족의 현황을 기록한 「건주 견문록(建州見聞錄)」, 억류되었을 때 보낸 편지 등이 실린 『자암집(紫巖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