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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76
한자 李萬雄
영어음역 Yi Manung
이칭/별칭 심보(心甫),몽탄(夢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의
대표관직 동래 부사
출생 시기/일시 162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9년 3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1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연안 부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61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8년 - 신도비 건립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묘소|단소 이만웅 묘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신도비 이만웅 신도비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심보(心甫), 호는 몽탄(夢灘). 아버지는 이행건(李行健)[1588~1654]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로서 성을 방어한 공로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심대후(沈大厚)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만웅(李萬雄)[1620~1661]은 1649년(효종 즉위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의 부수찬·수찬·부교리, 사간원 헌납, 홍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고 1659년(효종 10) 임금의 특명으로 동래 부사로 나갔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이만웅은 1659년 3월 동래에 부임하였고, 그해 11월 왜인들이 공작미(公作米)[일본과의 공무역에서 물건 값으로 지급한 쌀] 문제로 소요를 일으키자 과격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가 부사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 의하면, 왜의 사신인 귤성반(橘成般)이 공목(公木)[일본과의 공무역에서 물건 값으로 지불한 무명]의 품질이 나쁘니 공작미를 더 달라고 요구하였다. 전에도 이런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일부만 허락하였다. 하지만 귤성반 일행 20명은 양을 늘려 달라며 동래부 관아에 버티고 앉아 시위를 하였다.

동래 부사로서 이 사건을 해결해야 했던 이만웅은 ‘소요를 일으킨 자들을 제거하고 쓰시마[對馬] 쪽에 화친을 끊겠다고 통보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과격한 내용에 놀라 이만웅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듣고는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복관되어 연안 부사와 황해 감사를 지냈다. 이만웅은 1661년(현종 2)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은퇴하고, 그해 세상을 떠났다.

[묘소]

이만웅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8년(숙종 24)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김창협(金昌協)이 글씨를 썼으며, 이징하(李徵夏)가 전각을 한 이만웅 신도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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