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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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萬雄 |
영어음역 | Son Manung |
이칭/별칭 | 적만(敵萬),야촌(野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지현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 아버지는 손신의(孫慎儀)이고,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증손자는 손익현(孫益顯)이다.
[활동 사항]
손만웅(孫萬雄)[1643~1712]은 1669년(현종 10)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71년(현종 12) 오수 찰방에 임명된 이후 1674년(현종 15) 공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지냈다. 1675년 영광 군수 퇴임 후 중앙으로 복귀하였고, 1677년(숙종 3)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고향인 상주로 낙향하였다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한 후 복귀하였다. 이후 공주·나주·괴산·청주의 목사를 거쳐 1692년(숙종 18) 동래 부사로 부임하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손만웅은 1692년 10월 동래에 부임하였다. 부임 한 달 전에 늙은 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임명을 취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에 동래에 부임하여 11월 연향(宴饗)[잔치를 베풀어 손님을 접대함] 때문에 왜관을 다녀왔다고 한다. 1693년(숙종 19) 3월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났다. 경주 부윤을 마지막으로 벼슬살이를 접고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퇴계학파에 속하며, 1774년(영조 50) 증손자 손익현이 펴낸 『야촌 선생 문집』[6권 3책, 목판본]이 있다.
[상훈과 추모]
1784년(정조 8)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 구호서원(龜湖書院)에 배향되었다. 1866년(고종 3) 불천위(不遷位)[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재실인 추모재(追慕齋)가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