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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57
한자 南益熏
영어음역 Nam Ikhun
이칭/별칭 훈중(熏中),파은(坡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순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의령
대표관직 동래 부사
출생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2년 - 별시 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74년 - 예문관 검열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1년 6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3년 3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퇴임
활동 시기/일시 1692년 -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93년 6월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훈중(熏中), 호는 파은(坡隱). 조선 개국 공신인 영의정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1655년~1656년 경상 관찰사를 지낸 남선(南翧)[1609~1656]이다.

[활동 사항]

남익훈(南益熏)[1640~1693]은 1672년(현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사관에 천거되고,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이때 세자[후의 숙종]의 신임을 얻어 1674년(숙종 즉위년)부터 예문관 검열·전적·사간원 정언·호조 좌랑·홍문관 수찬·의흥 현감·교리·안악 현감·이조 좌랑·밀양 부사를 역임하였다. 1681년(숙종 7) 6월부터 1683년(숙종 9) 3월까지 동래 부사를 지냈다. 동래에 부임한 남익훈은 1681년 쓰시마[對馬] 문위행(問慰行)[조선에서 쓰시마에 파견한 공식 외교 사절] 업무와 이듬해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의 장군 습직 축하를 위해 일본에 보낸 통신사행의 실무를 처리하였다.

1678년(숙종 4) 동래 부사 이복(李馥)이 새로 지은 초량 왜관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7개 항으로 된 무오 절목(戊午節目)을 마련하여 올렸다. 이에 조정은 왜관의 관수에게는 동래 부사가 자세한 내용을 알리고, 쓰시마 도주에게 사신을 보내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하였다. 1681년의 문위행은 왜관 관리 규약인 무오 절목을 협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무오 절목이 합의된 이후 부산의 왜관 경계에 금표(禁標)가 세워졌다. 하지만 두 달도 안 되어 왜인이 마음대로 왜관을 벗어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남익훈은 왜관 안에 무오 절목의 내용을 새긴 비를 세우고, 규칙을 어긴 자는 엄벌에 처할 것, 다시 문위행을 보내서 절목 위반자 처벌, 일본 사절의 잦은 내왕, 세견선에 대한 과한 접대로 경상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 등을 알리도록 하였다.

1682년(숙종 8) 파견된 통신사 윤지완(尹趾完) 일행이 쓰시마 도주를 만나 왜관에 사는 왜인들의 규율 준수, 밀무역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남익훈은 1683년 왜관에 계해약조의 내용을 추려서 적은 약조 제찰비(約條製札碑)를 세웠다. 동래 부사 임기를 끝낸 뒤 승지·공조 참의·나주 목사·장례원 판결사·여주 목사·형조 참의·장단 부사·호조 참판·동지의금부사·양주 목사를 역임하고 1692년(숙종 18) 경상 관찰사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로 옮겼다. 1693년 6월 임지에서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고전 소설 『옥루몽(玉樓夢)』을 지은 이가 남익훈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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