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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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㳣 |
영어음역 | Gang Ro |
이칭/별칭 | 기중(期中),표운(豹雲),정은(貞隱),익헌(翼憲)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현명철 |
[정의]
개항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기중(期中), 호는 표운(豹雲)·정은(貞隱).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강이구(姜彛九)이다.
[활동 사항]
강로(姜㳣)[1809~1887]는 1837년(헌종 3) 진사시를 거쳐 1848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홍문관 정자(正字), 홍문관 응교를 거쳐 1857년(철종 8)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1863(철종 14) 3월 경상 좌도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대일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강로로 하여금 일본 정세를 잘 살피도록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江戶幕府]의 권위가 약해져 각지에서 지방 호족인 다이묘[大名]가 발호하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쓰시마[對馬]에서도 태수(太守)가 은거에 들어가고 세자가 뒤를 잇는 등 내홍이 일어나 어느 때보다도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시기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로 피폐해진 강화도에 위유사(慰諭使)로 나갔으며, 흥선 대원군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1871년(고종 8) 병조 판서를 거쳐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873년(고종 10) 흥선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고종(高宗)의 친정 체제로 바뀌면서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당했다. 1874년 복관되어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1879년(고종 16) 일본의 제물포항[현 인천]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으며, 봉조하(奉朝賀)[종2품 이상으로 70이 넘어 퇴직한 고위 관리에게 내리던 벼슬]로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883년(고종 20) 대원군 파로서 임오군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탄핵을 당해 경상남도 안의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87년(고종 24) 사면되었다.
[학문과 저술]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제4책]은 강로가 동래 부사 재임 시절 장계를 모은 것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익헌(翼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