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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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鍾和 |
영어음역 | An Jonghwa |
이칭/별칭 | 안용희(安龍熙),안전진웅(安田辰雄)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희진 |
[정의]
6·25 전쟁 때 부산에서 공보처 영화과장을 지낸 영화배우이자 감독.
[활동 사항]
안종화(安鍾和)[1902~1966]는 1902년 1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용희(安龍熙)이고 뒤에 안전진웅(安田辰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서울에서 공성학교를 졸업하고 봉명중학교를 다녔다. 1920년에는 신파극단 혁신단의 배우로 「장한몽」에 출연하였다. 1922년에는 윤백남(尹白南)의 민중 극장에 합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제작한 윤백남 연출의 저축 계몽 영화 「월하의 맹서」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1923년 안종화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창립한 극단 예림회에 들어가 문예부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여기서 나운규(羅雲奎) 등을 만나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1924년경 예림회가 경영난으로 해산하자, 안종화는 부산으로 와서 무대예술연구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무대예술연구회가 부산 국제관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무대예술연구회 회원 전원이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한국 최초의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전속 배우로 입사하게 되었다. 안종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나운규를 추천하였으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첫 작품 「해(海)의 비곡(秘曲)」에 배우로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영화인이 되었다. 「해의 비곡」에서 안종화는 주인공 진문기와 그 아들을 동시에 소화하는 1인 2역을 맡았다. 이듬해 안종화는 부산 동래 등지에서 촬영한 윤백남 감독의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과 왕필열(王必烈) 감독의 「신의 장」[1925]에 출연하였지만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문을 닫자 소속 배우들과 함께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제작한 영화를 가지고 지방을 순회하는 활동을 하며 배우 활동을 접었다.
이후 안종화는 신인 영화인을 배출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는데, 1927년 이경손(李慶孫)·김을한(金乙漢) 등과 함께 조선영화예술협회를 발족하여 산하에 연구부를 두고 김유영(金幽影)·윤기정(尹基鼎)·서광제(徐光霽)·임화(林和) 등 주로 카프 계열의 신인들을 양성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들어 안종화는 모두 13편에 이르는 작품을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편 1938년 조선일보사와 함께 처음으로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안종화의 감독 데뷔작은 조선영화사가 제작한 「꽃 장사」[1930]이고, 1934년의 작품 「청춘의 십자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이다.
1931년 중일 전쟁 개전 이후 안종화는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1939년 일제의 침략 전쟁에 조선 영화인을 동원할 목적으로 조선영화인협회를 창설하고 회장을 지내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1940년 황도학회에 가입하고,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에 참여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친일 논설을 게재하는 등의 친일 활동을 하였다. 1945년 2월 안종화는 조선총독부가 관리 감독한 제3회 연극 경연 대회에 조천석(朝天石)의 「개화촌」을 출품하였는데, 여기서 미국식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황국 신민의 삶을 찬양하는 한편 내선일체의 실증이며 일본 정신의 극치로서 가미카제 특공대의 의미를 미화하였다.
8·15 광복 이후 안종화는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다가 1948년 정부 수립 후 적산(敵産)인 조선영화사가 대한영화사로 개편될 때 촬영소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때인 1952년에는 임시 수도 부산에서 뉴스 영화 제작 및 배포를 관할하던 공보처의 영화과장을 지냈다. 임시 수도의 정부 청사로 사용된 경남도청[현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지하실에 현상소가 설치되었고, 제작은 대한영화사가 담당하였다. 종전 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학장을 지냈다. 이후에도 여러 작품을 연출하였지만 큰 주목을 끌지 못하였고, 1960년에는 안종화의 유작이 된 「견우직녀」를 부산에서 로케이션 촬영하였다. 오랫동안 중풍으로 투병하다가 1966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신극사 이야기』·『한국 영화 측면 비사』[1962]가 있다. 연출한 영화로는 「노래하는 시절」·「꽃장사」[1930]·「청춘의 십자로」[1934]·「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역습」[1936]·「인생 항로」[1937]·「수우」[1948]·「나라를 위하여」[1949]·「사도세자」·「천추의 한」[1956]·「춘향전」[1958]·「견우직녀」[1960]가 있다. 이 중에서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는 「꽃장사」·「청춘의 십자로」·「은하에 흐르는 정열」·「역습」·「인생항로」·「나라를 위하여」등이 있다. 또한 왕필열 감독의 「해의 비곡」[1924]·「신의 장」[1925], 윤백남 감독의 「총희의 연」(1925)에는 직접 출연하였다. 직접 편집한 작품으로는 「청춘의 십자로」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제6회 서울시 문화상(영화)를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