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47 |
---|---|
한자 | 李慶孫 |
영어음역 | Yi Gyeongso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희진 |
[정의]
1920년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영화감독.
[활동 사항]
이경손(李慶孫)[1904~1976]은 1904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체신국 부설 학교인 상성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가서 교토[京都]에 있는 동지사대학의 분교인 경성신학원에서 2년간 종교·윤리·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1923년 이경손은 무대예술연구회 동인이 되었다. 1924년에는 부산시 중구 중앙동에 있는 부산 국제관에서 무대예술연구회의 공연을 하던 중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발탁되어 입사하게 되었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 부산에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영화사였다.
1924년 이경손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창립 작품인 「해의 비곡」에서 조감독이자 바보 역을 연기하는 연기자로 참여하는 행운을 잡았다. 1925년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총희의 연」[일명 「운영전」]에서도 조감독을 맡았는데, 이 작품은 부산의 동래를 비롯하여 밀양의 영남루 등에서 촬영을 한 영화였다.
그런데 「총희의 연」을 제작할 때 이경손은 일본 제작진과 불화를 빚게 되어, 감독 윤백남(尹白南), 주인공 나운규(羅雲奎)와 함께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퇴사하고 서울로 가서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이경손은 백남프로덕션에서 1925년에 영화 「심청전」으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때 「심청전」에서 심봉사로 열연한 것이 나운규였다. 이후 이경손은 백남프로덕션을 나와 독자적으로 고려키네마를 창립하였다. 고려키네마의 첫 작품이 1925년 이광수(李光洙) 원작을 필름에 담은 「개척자」였다. 처음으로 근대 소설을 영화화하여 영화사의 새로운 기록을 세운 「개척자」에서 이경손은 감독뿐 아니라 각색까지 맡아 발분하였다.
1926년에 이경손은 계림영화사를 창립하고, 작가 심훈(沈熏)을 배우로 기용한 영화 「장한몽」을 만들었다. 「장한몽」은 1927년 6월 3일 부산 국제관에서 개최된 키네마 경영회(競映會)에 출품되기도 하였다. 1926년에 이경손은 새로이 활극 장르를 개척하여, 「산채왕」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1928년에는 이경손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1년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이경손은 중국 고성영화공사를 제작자로 한 「양자강」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반에 상영되지 못하였다. 영화 내용에 중국 국민당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이 있어 상영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경손의 마지막 작품이 된 영화 「양자강」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들을 모아 무료 관람을 시켰다. 이후 이경손은 태국으로 옮겨가 영어 교사 생활을 10여 년 동안 하다가 군용차 수입 중개업을 하기도 하였다. 방콕에서는 한국교민회장을 역임하였고, 1976년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연출한 영화로는 「개척자」·「심청전」[1925]·「산채왕」·「봉황의 면류관」·「장한몽」[1926]·「숙영 낭자전」·「춘희」[1928]·「양자강」[1931] 등이 있다.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는 「개척자」·「심청전」·「봉황의 면류관」·「장한몽」·「숙영낭자전」·「춘희」등이 있다. 또한 「개척자」·「숙영낭자전」은 제작과 기획까지 맡았다. 「해의 비곡」·「심청전」·「봉황의 면류관」·「숙영낭자전」에서는 직접 배우로 출연하였으며, 「봉황의 면류관」·「숙영낭자전」·「춘희」는 편집도 맡았다. 1926년에는 영화 소설 「백의인」을 『조선 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64년 12월 『신동아』에 「무선 영화 시대의 자전」이라는 글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