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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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澤根 |
영어음역 | Yun Taekgeun |
이칭/별칭 | 윤일(尹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박철규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가계]
윤택근(尹澤根)은 1898년 12월 27일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명동리에서 윤규찬(尹奎贊)과 옥달순(玉達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거제시 아주동 280번지로 이사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윤일(尹一)로 불리기도 하였다. 아내 옥우수(玉又守)와의 사이에 큰아들 윤병규(尹炳圭) 외에 윤봉금(尹鳳金)·윤마리아(尹瑪利亞)·윤한순(尹漢順)·윤해광(尹解光)·윤정연(尹貞蓮) 등 1남 5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윤택근은 어린 시절 고향인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명동리에 있는 천곡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1919년 거제시 연초면 천곡리에 보명강습소를 설립하여 조선어 보급 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4월 3일 거제시 아주동의 옛 아주리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주동자로 지목되어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으로부터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소한 이후 3·1 운동 동지들과 함께 거제시 이운면[옛 장승포읍] 이운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1925년 10월 동아일보 거제도지국 기자, 12월 경남청년연맹 준비위원회 상무위원, 1926년 8월 23일 사상 단체인 불꽃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8월 이후 고향 거제를 떠나 제2의 고향인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으로 옮겼고, 1927년 6월 동아일보 김해지국 대저주재 기자로 있으면서, 1928년 2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제3차 대회에 경상남도 대표로 출석하였다. 같은 해 3월 중앙조직부원 및 경상남도책이 되었으며,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9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했으며, 1932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조선 민족 해방 만세’ 등을 불렀다는 이유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추가로 선고하여 5년 6개월 동안 감옥에서 생활해야 하였다.
1945년 10월 부산에서 경상남도 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경상남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위원 및 경상남도 의장, 조선공산당 경상남도 도통제위원장이 되었다. 10월 사회노동당 합당위원회에서 발표한 삼당 합당에 대한 결정서에 서명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 중앙상임위원 겸 부산시당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3월 근로인민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부산형무소에서 5년 동안 붙잡혀 있다가 1953년 8월에 출옥하였는데, 이후 감옥에서 얻은 여러 지병으로 인하여 1967년 12월 22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