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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995
한자 金丹串堡城-
영어의미역 Site of Geumdangot Boseong Fortress
이칭/별칭 금단곶 보성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산129-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곽 터
소유자 개인
관리자 부산광역시 강서구청
건립 시기/일시 1485년연표보기 - 금단곶 보성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5년 - 4도순찰사 홍응이 요청하여 남해 미조항과 함께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시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10년 - 삼포왜란에 권관 최양이 금단곶의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웅천성을 구원함
소재지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산129-4
출토 유물 소장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로 210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금단곶에 있는 조선 시대에 축성된 보성 터.

[개설]

조선 시대의 보(堡)는 방어상 중요한 곳으로서 진성(鎭城)이나 읍성(邑城)보다는 규모가 작은 성이며, 대략 내상(內廂)의 무재 군관(武材軍官)인 권관(權官)이 파견되어 방수를 책임졌다. 금단곶 보성은 석축으로 성고개[73.8m] 정상부를 남북 직선으로 하여 동쪽 경사지로 이어져 문지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산과 평지가 만나는 경계면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골짜기를 포함하는 포곡식(包谷式) 형태이다. 둘레가 약 450m 규모로 평면 타원형을 보이고 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중종실록(中宗實錄)』, 『여지도서(輿地圖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의하면 “부(府) 남쪽 52리 지점에 있으며, 석성으로 둘레가 2,568척이고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축조 시기는 1485년(성종 16) 4도 순찰사(四道巡察使)인 홍응(洪應)이 요청하여 남해 미조항과 함께 금단곶 보성을 쌓고 병사를 두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에는 권관(權官) 최양(崔洋)이 금단곶의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웅천성(熊川城)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동한 사실[熊川城孤單抄 發金丹串軍一百 使李海及同鎭 假權官崔洋率領赴援)이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지도서』의 기록으로 볼 때 18세기 말 이전에 성의 기능이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 경위]

금단곶 보성은 부산에서 진해로 가는 고갯마루에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 남해 미조항과 함께 자주 출몰하는 왜선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위치]

금단곶 보성 터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산129-4번지 일대로, 부산~진해 간 국도 제2호선 중 녹산과 송정동을 경계로 한 성고개의 서쪽 정상 아래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부산광역시립박물관금단곶 보성 터에 대한 1차 발굴 조사와 추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는 북쪽의 경우 성 안쪽에서 외벽 쪽으로 생토면을 L자 형으로 굴착하여 바닥면에 10㎝ 크기의 잡석(雜石)을 전면적으로 깔았다. 외벽에서 내벽 쪽으로 1.5m 정도까지는 잡석 상부에 두께 20㎝ 내외의 판석을 깔아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로 약 10~20㎝ 정도 뒤로 물리어 기단석(基壇石)을 배치한 뒤 가로 90㎝, 세로 60㎝, 높이 80㎝ 정도의 대형 성벽석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외벽 기단부의 1m 바깥에서 성벽의 기단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높이 50㎝ 내외의 기단 보조 석축도 확인되었다. 보조 석축 중 양호한 곳은 잔존 높이 50㎝ 내외, 석축 2단 정도로 석축의 안쪽에 잡석이 채워져 있는 곳도 있다. 내벽은 외벽 쪽으로 L자 형으로 절토된 생토면의 잡석층 위로 정방형에 가까운 석재로 축조하였는데, 내벽의 뒷채움석은 성벽 안쪽에서부터 석렬처럼 덧붙여 평면상으로 볼 때 겹으로 벽을 이루고 있다.

성벽의 너비는 6m 내외로 L자 형으로 생토면을 정지한 부분에서 외벽까지가 4.5m 정도이고, L자 형으로 절토된 곳에서 내벽까지가 약 1.5m 정도이다. 잔존 높이는 1m 내외로 대부분의 외벽 석은 훼손된 상태이다. 동쪽 경사지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계단식 축조 수법을 사용하였는데, 북쪽 정상부에서 동남쪽의 치성까지 경사져 내려오는 성벽은 약 5m 간격으로 0.5~1m 정도 높이 차이를 유지하면서 기단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치(雉)의 동쪽 경사지에 축조된 성벽의 경우 성벽의 진행 방향과 직교하게 경사면의 생토층을 너비 3~4m, 높이 약 2m 내외로 기단을 수평화하여 마치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 조성된 바닥면의 아래쪽 수직면에는 삭평된 생토면 높이만큼 그 내부를 할석으로 채운 뒤 그 상부에 이보다 단이 높은 구간의 상면 높이까지 축대를 쌓고 다시 그 사이를 할석으로 수평을 맞추면서 낮은 곳부터 반복적으로 채운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벽의 부속 시설물로서 치(雉)는 동북쪽 절개지에서 확인되었는데 성벽에 덧대어 쌓은 것으로, 가로 2.7m, 세로 5m 정도만 잔존하고 있다. 치성 벽의 축조 방법은 성벽의 축조 방법과 동일하다.

동쪽 경사지의 석축이 남쪽 평지로 연결되는 부분에서 옹성문지(甕城門址)가 조사되었는데,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초석(礎石)[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돌] 간의 중심 거리는 정면이 3.6m, 측면이 1.7m 내외이다. 옹성은 성 밖에서 볼 때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둘러진 것으로, 북쪽으로 성벽과 나란히 개구부가 난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片門式甕城)이다.

옹성 기단부의 축조 수법은 성벽과 동일하며, 옹성 벽석은 대체로 가로 100㎝, 세로 50㎝ 크기의 비교적 큰 면석을 세워 쌓았고, 그 위에 가로 40㎝, 세로 60㎝ 정도 크기의 세로로 긴 돌을 걸쳐 무게 중심이 성벽 안쪽으로 오게 하여 성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옹성의 내직경은 약 7.4㎝이고, 성의 너비는 4.8m, 최고 잔존 높이 2.5m이며, 성벽과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문지의 바닥에는 판석상의 석재를 전면에 깔았는데, 남쪽에 치우쳐 소형 배수구의 흔적도 조사되었다. 문지의 성벽 폭은 4.8m로 원래 5m 전후로 보이며, 문지의 바닥에서 다수의 기와편이 출토되어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의 중심부에서 건물 터의 축대가 조사되었는데, 길이 7m, 4~5단 정도의 석축으로 축조 상태는 비교적 조잡하다. 한편 출토 유물은 암키와와 수키와가 대부분으로, 막새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문양은 변형 나무가지문[변형수지문(變形樹枝文)], 파도문[창해파문(滄海波文)], 평기와를 가공한 연목(椽木)[서까래] 기와 등으로 대부분 문지에서 출토되었다. 도자기는 소량의 인화문 분청사기편, 흑유 자기편이 출토되었고, 다량의 귀얄분청,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옹성은 차후 복원 정비를 위하여 현재 매몰된 상태이며, 옹성의 북쪽 성벽은 부산~진해 간 국도 제2호선 확장 공사로 인해 없어졌다. 서쪽과 남쪽의 잔존 성벽은 남쪽에 잔존하고 있으며, 금단곶 보성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금단곶 보성 터는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보성(堡城)으로, 입지상 고개의 정상부 아래에 위치하는 특이한 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비교적 양호한 옹성문지가 조사되어 도로를 우회하여 개설하였다. 금단곶 보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금단곶에 소와 말을 방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동안 목장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옹성과 치가 발굴되면서 군사적 성격의 보가 와전(訛傳)된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수습된 도자기편과 기와편 등은 조선 시대의 도자기 역사와 기와 연구를 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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