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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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英秀 |
영어음역 | ak Yeong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나종만 |
[정의]
제17대 부산 시장을 역임한 행정 관료.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1928년 4월 10일 경상남도 사천에서 아버지 이억대(李億大)와 어머니 이대엽(李大葉) 사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박영수(朴英秀)는 1941년 일출공립소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에서 중등 과정을 마쳤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1954년 국방대학원, 1958년 육군대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재직하던 중에 1961~1963년 강원도 경찰국장과 경상남도 경찰국장에 각각 기용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 경찰국장으로 재임하던 중에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박영수는 1966년 대통령 비서실 특별민정반장으로 기용되었다가, 1968년 내무부 치안국장을 거쳐 1969년 내무부 차관을 지냈으며, 1971년 6월 12일 제17대 부산 시장에 취임하였다.
박영수는 부산 시장으로서 6년 1개월이라는 장기간의 재임 기간을 통하여 건전 도시 건설, 신뢰받는 시정 구현, 사회 기풍의 쇄신, 시민 총화 완성을 시정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는 전임 시장들이 펼쳐 놓은 사업들의 착실한 마무리에 주력하면서, 재임 6년 동안 부산이 국제적인 대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하였다.
주요 업적을 살펴보면 도시 기본 계획의 수립, 연장 387㎞의 도로 축조 정비에 의한 도로율 8%와 포장률 51% 달성, 서민 주택 건립, 상수도 확장 사업, 토지 구획 사업의 실시, 하수 처리장의 착공, 도시 고속 도로와 부산 대교의 착공, 관광 시설의 대폭 확충, 생산업체의 적극 지원에 의한 수출액 180만 달러 달성, 시민 소득 351달러 달성, 사회 복지 시책의 추진, 도시형 새마을 운동의 심화 발전 등이었다. 또한 박영수는 문화 방면에도 주력하여 시민 회관 완공, 민속 예술관과 시립 박물관 건립, 국제 규모의 아시아 영화제 개최 등의 실적을 남겼다.
1977년 7월 6일 부산 시장에서 물러난 박영수는 1980년까지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80~1982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1981~1982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과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을 지내고, 1983~1985년 대한주택공사 사장으로 근무하였다. 1985년 근대 5종 바이애드론 경기연맹 회장과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SAGOC] 위원을 역임하고, 1985~1987년 대통령 비서실장, 1987~1988년 무역진흥공사 사장과 고려무역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10월 9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영수는 생전에 금성 화랑 무공 훈장, 국민 훈장 무궁화장, 자유중국 대수 경성 훈장, 미국 민간인 공로 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