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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954
한자 李承晩
영어음역 Yi Seugman
이칭/별칭 승룡(承龍),일수(一秀)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2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
성별
본관 전주
대표관직 대통령
출생 시기/일시 1875년 4월 18일연표보기 - 출생
출생 시기/일시 1899년 - 투옥
출생 시기/일시 1904년 - 석방, 밀사로 미국에 파견됨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미국으로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1일 - 상해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탄핵으로 대통령 면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지휘
활동 시기/일시 1946년 5월 6일 -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북진 무력 통일을 천명함
활동 시기/일시 1948년 5월 - 초대 국회 의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15일 - 초대 대통령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9년 - 건국 공로 훈장 대한민국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0년 8월 -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함
활동 시기/일시 1951년 11월 - 자유당 창당
활동 시기/일시 1951년 11월 30일 - 대통령 직선제 개정안 제출
활동 시기/일시 1952년 5월 25일 - 부산, 경상남도,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 일원에 계엄령 선포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제2대 대통령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3년 6월 18일 - 반공 포로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53년 10월 1일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활동 시기/일시 1954년 8월 - 뉴욕 시 공중 봉사 공로 표창장과 메달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5년 3월 21일 - 미국 금영 자유 훈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56년 - 제3대 대통령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4월 26일 - 하야 성명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60년 5월 29일 - 하와이로 망명
몰년 시기/일시 1965년 7월 19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황해도 평산 -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거주|이주지 서울 - 서울특별시
수학지 배재학당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수학지 조지워싱턴대학교 - 미국 워싱턴 DC
수학지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 미국 메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
수학지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
묘소|단소 국립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정의]

6·25 전쟁 때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이끈 초대 대통령.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일수(一秀).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다섯째 서자 이흔(李訢)의 15세손으로 아버지는 이경선(李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다.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이다.

[활동 사항]

1. 구한말~일제 강점기

이승만(李承晩)[1875~1965]은 1875년 4월 18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중 1894년(고종 31) 과거제가 폐지되자 이듬해 미국 선교사가 세운 서울의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문명을 접하였고,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등의 영향을 받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899년(고종 36) 독립협회 회원들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탈옥을 시도하였다가 무기 징역을 선고 받고 5년 넘게 옥살이를 하던 중 1904년 러일 전쟁 시 일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을 때 『독립 정신』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승만은 정신, 제도, 외교적 측면에서 한국을 완전한 서구화·기독교화하자고 제안하였다.

1904년 말 이승만민영익(閔泳翊)·한규설(韓圭卨)의 밀사 자격으로 미국에 파견되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견,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 데 힘써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미국에 머물면서 1905~1910년 사이에 조지워싱턴대학교, 하버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잠시 몸담았으며,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략(方略)은 ‘외교 독립 노선’과 ‘실력 양성론’이 두 개의 축을 이룬다. 국제 정세가 일본을 배척하는 쪽으로 기울면 외교 독립론을 강조하고, 일본에 우호적일 때는 실력 양성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임시 정부론, 공채 모집, 미국 의회 청원 운동, 자치론’ 등을 추구하였던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같은 외교 노선을 바탕으로 3·1 만세 운동 이후 본격적인 독립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1919년 9월 11일 상해 임시 정부[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에 한국의 위임 통치를 건의하였다는 이유로 상해 임시 정부 요인들로부터 탄핵을 당해 1925년 면직 처분을 받았다. 1941년 상해 임시 정부 산하 구미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이 되었다. 이때 미국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승인 및 군사 원조를 위한 외교에 주력하였다.

1942~1943년에는 미국의 군사조정국·전략첩보기구와 연계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군사 원조 및 한인 게릴라 부대 창설을 요청하였다.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기 모양의 우표를 발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여러 차례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을 하였다. 이 방송 연설은 1945년 광복 이후 이승만이 남한 정계에서 우익[보수적이거나 온건주의적 경향을 지닌 정치 세력]과 좌익[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경향을 지닌 정치 세력] 양쪽의 지지를 받는 민족 지도자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 해방~정부 수립

광복 후 이승만은 미국 군정 지도자 맥아더(Douglas MacArthur) 와 하지(John Reed Hodge)의 지지 아래 귀국하였다. 이승만이 귀국 직후 ‘최고 지도자’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은 미 군정 및 우익과 좌익 모두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 취임을 거절함으로써 좌익과 결별하고, 반공산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1945년 12월 말부터는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김성수(金性洙) 등과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1946년 1월 초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 방침을 정하고, 1946년 5월 6일 목포 강연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및 북진 무력 통일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그 결과 1946년 중반기 우익 대중 조직뿐만 아니라 정치 자금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그해 말에는 서울과 지방의 우익 조직, 경찰·공무원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 7월 미국이 공식으로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안을 채택하였을 때, 남한에는 더 이상 이승만의 정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 의원 선거 후 초대 국회 의장에 선출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이승만은 단독 정부 수립에 성공하였다.

3. 부정선거와 하야

1950년 5월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남북 협상파와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되어 이승만의 입지가 약해졌다. 게다가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 중에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같은 실정(失政)으로 거센 비판과 함께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1·4 후퇴 시기에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예산을 착복하여 많은 군인이 병사한 사건] 때 이승만은 ‘용공분자(容共分子)[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사람]의 음해’라고 주장하는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金潤根)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국회와 여론의 강한 압박에 못 이겨 결국 김윤근을 사형시켰다. 거창 양민 학살을 주도한 김종원(金宗元), 오익경(吳益慶), 한동석(韓東錫) 등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후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승만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1951년 11월 자유당을 창당하고 총재를 맡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52년 남북 협상파와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를 주도하는 국면이 되었고, 민주국민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재선이 힘들어졌다. 이런 난관을 돌파하고자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 직선제 개정안을 냈으나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백골단, 땃벌떼 등 깡패 조직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도록 하였다.

제헌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실시하지 않고 있던 지방 자치도 시작하였다. 국회 의원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로는 재선될 자신이 없었던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압박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1952년 4월과 5월 시, 읍, 면 의원 선거와 도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부산시의회는 8개 선거구에서 35명의 의원을 뽑았는데, 이승만의 지지 세력인 자유당은 4명, 국민회는 5명이 당선되었다. 지방 의회는 이승만 정권에 유리한 여론 몰이 수단으로 악용되어 연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국회를 압박하였다.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는 국회 의원들이 타고 있던 출근 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하여 국제 공산당 관련 혐의를 씌워 구속해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다. 이렇게 정국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은 뒤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중심으로 한 발췌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승만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및 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74.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태는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의 정치 지도자를 바꿀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을 끌어내릴 경우 전쟁 수행에 대한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염려와 함께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을 찾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부산에서 전쟁을 독려하면서, 북한과 국제연합[UN] 간에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직후부터 일관되게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하였다. 1952년 3월에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면서 남한 단독으로라도 계속 싸우겠다고 강조하였다. 휴전 협정을 방해하기 위해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들이댄 카드는 군 작전 지휘권 환수와 반공 포로 석방이었다. 당시 유엔과 미국은 포로 교환 방식을 놓고 북한 측과 줄다리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휴전 반대 시위를 하도록 시키고, 1953년 6월 18일 유엔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각지에 억류되어 있던 반공 포로 2만 6400여 명을 석방해 버렸다.

1953년 10월 1일 이승만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미군의 한국 주둔과 평화 안전 유지, 집단적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체결을 이끌어 냈다.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외에 20개 사단 규모의 군대와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군사·경제 원조도 약속 받았다. 이승만은 6·25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0년에는 네 번째 대통령을 하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부정 선거로 꼽히는 3·15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1965년 망명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논란 끝에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학문과 저술]

이승만은 1908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영한사전』, 『독립 정신』, 『일본 내막기』, 『건국과 이상』, 『이승만 한시선』, 『일본 그 가면의 실체』, 『일민주의 개설』[일민주의 보급회, 1949] 등이 있다.

[묘소]

이승만의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49년 건국 공로 훈장 대한민국장, 1954년 8월 뉴욕 시에서 수여한 공중 봉사 공로 표창장과 표창 메달, 1954년 워싱턴 시 도착 기념 환영의 열쇠, 1955년 3월 21일 미국 금영 자유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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