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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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相英 |
영어음역 | An Sangyeong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7가 2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유영국 |
[정의]
부산 출신으로 제25대와 31대 부산 시장을 지낸 관료이자 정치인.
[활동 사항]
안상영(安相英)[1938~2004]은 1938년 11월 18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8월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서울시청 토목직 7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지하철건설본부 건설 차장, 서울시청 도로 국장·도시 계획 국장 등을 맡아 서울의 강남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 뒤 서울특별시 종합건설본부 본부장으로 한강 종합 개발과 올림픽 대로 건설을 주관하였다. 1985년 2월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제25대 관선 부산직할시장에 임명되었다. 부산 시장 재임 시 부산 앞바다에 인공 섬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반대 여론과 함께 민간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포기하였다. 서낙동강권 개발, 가덕 신항만 건설, 부산권 광역 교통망 구축,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 등 굵직한 개발 사업을 계획 또는 추진하였고, 금융 기관 본사 부산 유치, 농산물 유통 단지 조성, 종합 사회 복지관 확충 등을 추진하였다.
안상영은 1990년 12월 시장 퇴임 후 해운항만청장으로 부임하여 1992년까지 재직하였다. 그 뒤 한국항만협회 고문, 벽산건설 부회장 등을 거쳤다. 서울의 한강 개발 공사 때 인연을 맺은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권유로 1996년 대우그룹 계열사인 부산매일신문사 사장으로 옮겨 2년간 재직하였다.
1998년 부산 시장 선거 때 당시 뇌물 수수 혐의로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던 문정수 시장을 당내 후보 경선에서 누르고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무소속인 김기재 후보와 접전 끝에 당선, 제31대[민선 제3대] 부산광역시장이 되었다. 1998년 7월 제3회 부산 국제 영화제 명예 조직 위원장, 1999년 12월에는 부산영상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겸하였다. 같은 해 6월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에도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 재선에 성공하여 7월 제32대[민선 제4대] 부산광역시장에 취임하고, 부산 아시안 게임 등 대규모 국제 행사도 성공적으로 치러 냈다. 동부산 및 서부산권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등 ‘기업하기 좋은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주)부산관광개발의 부실화와 아시아드 컨트리클럽 특혜 매각 시도, 해운대 센텀시티의 과도한 개발과 부채 위기, 지나친 유료 도로 건설[전국 14개 유료 도로 중 7개가 부산에 있었음], 이른바 ‘동성 게이트’ 같은 수뢰 혐의 등 각종 정책 실패와 과오를 범하였다. 그중에서도 수뢰 문제는 안상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도화선이 되었다.
기업체 뇌물 수수 의혹은 민선 시장에 재선되기 직전부터 줄곧 제기되다가 2003년 10월 진흥기업 박 모 회장으로부터 1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0차례 공판을 받았다. 안상영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2002년 6월 지방 선거 때 부산 동성여객[현 삼성여객] 대표 이 모 등으로부터 3억 원을 받은 혐의까지 더해져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선고 공판을 5일 앞둔 2004년 2월 4일 안상영은 부산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영결식은 2월 8일에 거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3년 10월 30일 국무총리 표창, 1980년 10월 25일 보국 훈장 천수장, 1986년 9월 10일 홍조 근정 훈장, 1992년 6월 24일 황조 근정 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