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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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沆 |
영어음역 | Jeong Hang |
이칭/별칭 | 자림(子臨),문안(文安),이정일한(二鄭一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평로 335[양정동 464-1]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전기웅 |
[정의]
고려 전기 부산 동래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림(子臨). 증조 할아버지는 동래 호장 정지원(鄭之遠)이고, 할아버지는 동래 안일 호장 정문도(鄭文道)이며, 아버지는 대부경 정목(鄭穆)이다. 어머니는 검교 장작감(檢校將作監) 고익공(高益恭)의 딸이다. 부인은 강릉군부인 왕씨(江陵君婦人王氏)로, 숙종(肅宗) 때의 공신 왕국모(王國當)의 딸이다. 형은 어사잡단 정점(鄭漸), 소경 정택(鄭澤)이다. 아들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이고, 세 딸은 각각 최유청, 이직승, 김이영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정항(鄭沆)[1080~1136]은 어려서 학문을 깨쳐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1102년(숙종 7)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상주 사록(尙州司錄)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적지만 판단력이 뛰어나 정극영(鄭克永)·한충(韓沖)과 더불어 사록으로서 ‘이정일한(二鄭一韓)’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후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가 예종 때 내시(內侍)로 옮겼다.
1116년(예종 11) 추밀원 집주(執奏)를 지낼 때는 공평 정직하고 출납(出納)에 밝았다고 한다. 이자량(李資諒)을 수행하여 송나라에 갔을 때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螺)가 표장(表章)을 보고 칭송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올랐다. 업무를 논할 때 권신이나 귀족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어 정항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잠시 전주 통판(全州通判)으로 좌천되었다가 얼마 뒤 복귀하여 우사간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이 세력을 잡아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강직한 관료들을 내쫓았는데, 정항도 거기에 포함되어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축출된 뒤 예부 낭중이 되었다. 1127년에는 밀직사 승선(密直司承宣)으로서 『서경(書經)』의 열명(說命)·주관(周官) 편을 강의하였고 1129년(인종 7) 서적소(書籍所)에서 송조(宋朝)의 『충의집(忠義集)』을 강독하였으며, 1132년(인종 10) 기린각에서 『예기(禮記)』 중용(中庸) 편을 강의하였다.
개경을 기반으로 한 문벌 세력을 치기 위해 서경 천도를 꾀하던 승려 묘청(妙淸)의 건의로 인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묘청과 정지상(鄭知常)은 임금을 오래 잡아 둘 심산으로 간관들을 꾸짖으며 개경의 궁궐 수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정항은 궁궐 수리를 서둘러야 하며, 임금도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뜻을 이루었다. 그해 지공거(知貢擧) 최자성(崔滋盛)이 과거 시제(試題)를 잘못 내어 유사(有司)에서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정항은 최자성의 외조카인 공예 태후(恭睿太后) 및 한유충(韓惟忠)과 함께 간청하여 파직을 막았다.
1133년(인종 11) 성균시를 관장하고 이듬해 우승선(右承宣)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허홍재(許洪材)·최우보(崔祐甫) 등을 급제시켰다. 그해 수락당(壽樂堂)에서 한림학사로서 『시경(詩經)』의 7월(七月) 편을, 1135년에는 천성전(天成殿)에서 『당감(唐鑑)』을 강독하였다. 1136년(인종 14) 정항이 병들자 임금은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고 지추밀원사, 예부 상서, 한림학사, 승지에 임명하였으나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묘소]
조선 효종 때 정항의 묘가 경기도 장단군에서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다.
[상훈과 추모]
문안(文安) 시호를 받았으며, 정항의 묘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동래 정씨의 재실인 추원사[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에 배향되어 있다. 묘역 인근에 동래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화지사라는 사당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