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19 |
---|---|
한자 | 草梁港 |
영어의미역 | Choryanghang |
이칭/별칭 | 초량포(草梁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영도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영옥 |
[정의]
[개설]
초량항(草梁港)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래부지(東萊府誌)』 등에 “절영도(絶影島) 안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영도는 현재 영도(影島)를 가리킨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영도 안의 부산항 해변이 모두 초량항으로 지칭되었다는 설도 있고, 영도의 끝자락과 용두산 남쪽 끝자락[현 영도 대교 사이]에 있는 바다의 좁은 목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또 어떤 문헌에는 초량항이 ‘초량포(草梁浦)’로 되어 있기도 하다. 1678년(숙종 4) 4월 왜관(倭館)이 초량으로 이전되었을 때부터 인근의 초량항은 조선과 일본의 사신(使臣)이 경유하는 중요한 항구로 자리 잡았다.
[명칭 유래]
초량은 우리말 ‘새띠’, ‘새터’를 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지역이 억새풀과 삘기[띠풀]가 우거진 초원 지대이었다. 약 70년 전만 해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서 송도로 가는 고갯길에 억새풀과 띠풀이 우거져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곳을 ‘새띠 고개’ 또는 ‘샛디재’라고 한다. ‘새띠[샛디]’는 억새풀과 삘기를 일컫는 말이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초량항은 조선 시대 절영도 안에 있는 항구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부산광역시 영도구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왜관이 초량으로 이전된 이듬해인 1679년(숙종 5)에는 왜관의 경계를 명시하는 신관 금표(新館禁標)가 왜관 주변에 세워졌는데, 일본 자료 『분류 기사 대강(分類紀事大綱)』에는 남서쪽으로 초량항에서 강 하류까지, 서쪽으로 초량항에서 민가까지를 경계로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초량항의 위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동래현 산천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지고(與地考) 관방(關防) 경상도조, 『동래부지』 산천조에 모두 “절영도 안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