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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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包伊浦萬戶營 |
영어의미역 | Poipo Manho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수군만호영.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때 수군의 패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 관할에 있던 경상도 장기현의 포이포 만호영(包伊浦萬戶營)을 동래부 남촌면으로 옮겨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본영의 수장은 종4품의 만호(萬戶)이었다. 그 아래 군관(軍官) 18명, 진리(鎭吏) 10명, 지인(知引) 9명, 사령(使令) 2명이 있었다. 보유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전선에 딸린 군사는 1,100명이었다.
[관련 기록]
『태종실록(太宗實錄)』 13년 계사조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물 색깔이 변하였다. …… 번계포(樊溪浦)에서는 21일부터 24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고 누런 빛깔이 되어 고기가 죽고, 두모포에서는 20일에 물이 붉어지며, 포이포(包伊浦)에서는 20일부터 21일에 이르기까지 물이 붉어지고, 창원부(昌原府) 도만포(都萬浦) 등지에서는 21일에 물이 붉고 검어져 고기가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3년 정축조에는 “경상 좌도는 영해(寧海)에서 경주(慶州) 감포(甘浦)에 이르기까지 바닷길이 험악하고 섬도 없으니, 비록 수군이 있더라도 또한 배를 부리는 일에는 익숙지 못하므로 혹시 적병이 창졸히 이른다면 이를 방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름지기 육군을 사용해야만 우리의 장기(長技)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본군은 땅이 협착하고 백성이 적으니, 가까운 곳의 청하현(淸河縣) 및 영일현(迎日縣)의 북면(北面) 주진(注津) 이북과 경주 임내의 신광(神光) 등의 지역으로 합속시켜 진(鎭)으로 삼고, 영해의 축산포(丑山浦), 흥해(興海)의 칠포(漆浦), 장기(長鬐)의 포이포를 혁파하고, 그 선군을 이속시키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20년 갑술조에는 “신이 일찍이 영남을 안찰(按察)하였을 적에 좌도의 바닷가를 순찰해 보았는데, 축산포·포이포·율포(栗浦)의 구진(舊鎭)이 영해·영덕(盈德)·흥해 등의 지경에 있었습니다. 고로(古老)들에게 물어보니, ‘그전에 일본의 침범이 더러 여기까지 미쳤기 때문에 진을 설치하여 방비하였었는데, 그 뒤에는 수종(水宗)이 달라졌기 때문에 점차 각 진을 동래(東萊) 이하로 옮기고 옛적의 터만 그대로 남아 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경상북도 장기현에 있던 포이포 만호영을 부산 동래의 남촌면으로 옮겼다. 1895년(고종 32) 7월 군제 개편으로 전통 수군이 모두 혁파되면서 수군만호영도 함께 혁파되었다.
[의의와 평가]
포이포 만호영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의 수군 강화를 위한 수군 편제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또한 이 때문에 동래 부민들의 부담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