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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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通漢 |
영어음역 | Yang Tonghan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반송로 182번길 24[반송동 14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용범 |
[정의]
임진왜란 때 활동한 동래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형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양조한(梁潮漢)이고, 아들은 양의(梁義)와 양숙(梁鷫)이다. 종손은 양부하(梁敷河)[1581~1673]로, 일본에 끌려간 지 37년 만에 돌아왔다.
[활동 사항]
양통한(梁通漢)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형 양조한이 동래읍성 정원루에서 순절하자 의병이 되기로 마음먹고, 그해 6월 경주성 탈환을 위해 반월성 아래 강가에서 결성된 최초의 의병단인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1592년 7월 영천 복성(復城) 전투에 참전하여 성을 탈환하고, 8월 서천(西天)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9월 초 경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1596년 3월에는 팔공산에서 58개 고을의 의병장 420여 명이 모여 결성한 팔공산회맹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 양의와 양숙을 데리고 그해 7월 방어사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산회맹을 결성, 화왕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성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가 초야에 묻혀 살았다. 1629년(인조 7)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들 중 양부하가 형 양조한의 손자인 것을 알아내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대를 잇고, 일가를 번창하게 하였다.
[묘소]
양통한의 묘는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금정산 서쪽 자락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5년(숙종 21)에 정려가 건립되고 1736년(영조 12)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통훈대부 군자감 정에 추증되었다. 1839년(헌종 5) 동래 유림의 주도로 해운대구 반송동에 반송 삼절사(盤松三節祠)가 세워져 양통한을 비롯해 양조한, 광주 군수로서 성을 지키다 순절한 양지(梁誌) 등 남원 양씨(南原梁氏) 3인을 배향하고 있다. 양통한은 행적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아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하였으나 1992년부터 경주임란의사추모회가 주관하여 경주 임란 의사 창의 공원에서 문천회맹일인 6월 9일에 제향하고 있다. 2009년 4월 15일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망우 공원에 조성된 임란 호국 영남 충의단에 아들 양의와 함께 배향되었으며, 매년 4월 15일 영남 유림에서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