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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63
한자 李應元
영어음역 Yi Eungwon
이칭/별칭 춘서(春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덕발 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공태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성별
출생 시기/일시 1556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동래읍성 전투 등에서 활약
몰년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동래읍성 전투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덕발 마을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활동지 경상남도 양산시
묘소 산수곡 -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지도보기

[정의]

임진왜란 당시 부산 기장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고려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의 후손으로, 누전(累傳)하여 중시조인 고려 좌명공신 신호위 대장군 이대영(李大榮)의 13세손이다. 할아버지 이휘지는 파주 목사와 동래 부사로서 기장군 기장읍 덕발리에 시복(始卜) 입향조(入鄕祖)이며 아버지 이청춘(李靑春)은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을 지냈다.

[활동 사항]

이응원(李應元)[1556~1640]은 1556년(명종11)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덕발 마을에서 태어났다. 체구가 장대하고 음성이 호랑이의 울부짖음과 같았으며 항상 앞장서 모든 일을 해 나갔다고 한다. 이웃과 친척들은 장차 큰 장수가 될 재목으로 기대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에 있던 곡식을 모두 내어 가난하게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의병을 일으켜서 아버지 이청춘과 함께 동래읍성으로 가서 송상현(宋象賢) 부사와 함께 싸웠다. 그러나 끝내 성이 함락되고 아버지는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시체까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또한 전란 중에 방황하던 백성들을 동래 금정산 배암 은동굴(銀洞窟)에 100여 명을 피신시키고 적의 후방을 끈질기게 공격하였다. 부산에서 양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정진암(停陳岩)[양산 동면사무소에서 700m 떨어진 요새지] 싸움에서 관군과 합세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란이 끝나자 아버지의 초혼장(招魂葬)을 지내고 입산하였다. 은거 생활을 하는 곳에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강론을 들었는데, 아버지가 전사한 남쪽을 보고는 앉지 않았다고 한다. 거느린 비복(婢僕) 50여 가구 모두에게 논밭과 가축들을 골고루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640년(인조 18)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을 따로 남기지 않고 다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늘은 안다.”는 말만 하였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 산수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무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후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으나 해방 이후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폭파되어 버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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