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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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西征日記 |
영어의미역 | Record of Subverting Hong Gyeongnae-s Upris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허지은 |
[정의]
1592년 일본의 종군승이었던 천행(天行)이 쓴 부산 관련 내용이 포함된 일기.
[저자]
천행은 경도 묘심사(妙心寺)의 승려로, 대마도와 조선의 통교권을 얻기 위해 1577년과 1587년 두 차례 조선에 사절단으로 왔다. 임진왜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종군승(從軍僧)으로서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다. 일기로 『우무위전 조선 도해지 잡고(右武衛殿朝鮮渡海之雑藁)』[1577], 『조선국 왕환 일기(朝鮮国往還日記)』[1587], 『서정 일기(西征日記)』[1592] 있다.
[편찬/간행 경위]
『서정 일기』는 『속속군서류종(続続群書類従) 제3집 사전부(史傳部) 2에 실려 있다. 『속속군서류종』은 1906년에 일본의 국서간행회(国書刊行会)가 간행한 총서로, 18세기에 하나와호 키이치[塙保己一]가 편찬한 총서인 『군서류종(群書類従)』과 『속군서류종(続群書類従)』을 보완한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원문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 있어 이용이 가능하다.
[구성/내용]
1592년 3월 13일부터 같은 해 8월 10일까지의 사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군, 종의지군(宗義智軍)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다. 『서정 일기』에 실려 있는 4월 12~17일의 부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일 맑음. 병선 700여 척이 진각(辰刻)[8시경]에 대포를 떠나 신각(申刻)[16시경] 끝 무렵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태수 종의지(宗義智)가 바로 상륙하였고, 나도 그를 따랐다. 초경(初更)[20시경]이 지난 후에 배에 올랐다. 13일 반쯤 흐리고 반쯤 맑음. 묘각(卯刻)[6시경]에 부산성을 포위하여 진각이 다되어 갈 때 성을 함락시켰다. 성에 있던 군인들은 모두 살해되었거나 투항하였다. 즉시 동래로 가서 성에서 반리 정도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오각(午刻)[12시경]에 부산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태수가 나에게 오늘 밤은 부산의 진영에 머물라고 하였다. 14일 반쯤 흐리고 반쯤 맑음. 묘각에 부산을 떠났다. 진각에 동래성을 포위해서 1각 안에 성을 함락하였다. 목을 벤 것이 3,000여였고 5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조선의 군인들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동래에 있는 모든 [일본] 군인이 성을 날아 넘어왔다 …… 귀신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나는 태수의 명에 따라 부산에 머물렀다. 15일 맑음. 동래 남쪽 성이 있는데, 장기(機張)와 수영(水營)이라 한다. 두 성은 모두 이날 함락되었다. 나는 유각(酉刻)[18시경]에 동래성에 도착하였다. 16일 가랑비. 양산(梁山)의 성이 함락되었다. 17일 맑음. 관군[일본군]이 묘각에 동래를 떠나 사각(巳刻)[10시경)에 양산을 지났다. 밀양의 동쪽 50리쯤에 주둔하였다. 이날 밀양이 함락되었다[十二日晴 兵船七百餘艘 辰刻發大浦 申尾到釜山 太守直赴岸上 余隨之 初更之後上船 十三日 半陰半晴 卯刻圍釜山之城 面辰刻拔之 城中之軍盡授首 卽時赴東萊 距城半里許而屯 午刻歸釜山之營 今夜太守告余以留守釜山之營 十四日 半陰半晴 卯刻發釜山 辰刻圍東萊城 同刻拔之 斬首三千餘級 虜五百餘 鮮軍懼曰 東萊諸軍乃飛逾城 疑有乎 神乎鬼乎 余應太守之命 留于釜山 十五日晴 東萊南有城 曰機張水營 二城此日敗亡 余酉刻到東萊城 十六日 細雨 梁山之城敗亡 十七日 晴 官軍卯刻發東萊 巳刻過梁山 密陽之東五十里許宿 此日密陽敗亡].”
[의의와 평가]
『서정 일기』는 임진왜란에 관해 일본의 종군승이 기록한 내용으로, 이를 통해 소서행장군, 종의지군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