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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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禹長春 |
영어음역 | U Jangchun |
이칭/별칭 | 스나가 나가하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62번길 7[온천2동 850-4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선미 |
[정의]
1950년대 부산에서 활동한 육종학자.
[가계]
본관은 단양(丹陽).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禹範善)과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범선은 대한 제국 말 별기군 2대장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에서 명성 황후의 살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1903년 히로시마[廣島] 현 구레[吳] 시에서 전(前)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한국 이름 우소춘(禹小春)]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우장춘(禹長春)[1898~1959]은 아버지가 살해된 뒤 한동안 도쿄의 사찰인 희운사(喜運寺)에서 성장하였다. 희운사의 주지 아라이[新井慈剛]가 우범선이 결혼할 때 중매를 섰던 인연으로 우장춘의 양육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얼마 뒤 어머니를 따라 구레 시로 돌아간 뒤 구레중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19일 졸업하였다.
1916년 4월 1일 도쿄제국대학[동경제국대학] 부설 전문학교 농학실과에 입학하여 1919년 8월 9일 졸업하였다. 우장춘은 이때 가정이 매우 곤궁하여 뒤에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미노루[齋藤實]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20년 6월 7일 우장춘은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의 기수(技手)가 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였다. 1926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고, 그의 자녀도 스나가 성을 따랐다. 1936년 5월 4일 ‘종(種)의 합성’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로써 육종학자(育種學者)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 결과 1937년 8월 25일 농사 시험장 만년 기수의 딱지를 떼고 기사(技師)로 승진하였다. 1937년 8월 26일 농사 시험장을 퇴사하고 1937년 9월 11일 교토[京都]의 다키이[瀧井] 종묘 회사의 초대 연구 농장장으로 취업하였다. 1945년 9월 3일 다키이 연구 농장의 농장장직을 사임하고, 교토 인근의 장법사(藏法寺)에 머물렀다.
1947년 한국에서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시작되었고, 1950년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운영을 제의하자, 1950년 3월 8일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으로, 1953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가 중앙원예기술원으로 개편되자 중앙원예기술원장으로, 1958년 다시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원예 시험장으로 바뀌자 1959년까지 원예 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 농업재건임시위원회 위원, 1953년 임시농업지도요원양성소 부소장을 겸임하였고,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우장춘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이 기대와 환영 일색만은 아니었다. 그의 가계에 대한 노골적인 분개와 비아냥거림 또한 현실이었다.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멍에는 평생의 짐이었고, 더욱이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우장춘에 대한 시선은 따갑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 둔 우장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는 그의 일본행을 금지하였고, 이 때문에 어머니의 사망 후에야 일본을 다녀올 수 있었다. 뒤에 우장춘은 원예 시험장 앞의 우물에 자유천(慈乳泉)[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 솟는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어머니를 기렸다.
이런 가운데 우장춘은 동래 온천장의 원예 시험장에서 한국적 토양에 맞는 농법을 개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 결과 무와 배추를 비롯하여 그간 일본에 의존하고 있던 채소 종자의 국산화에 성공하여 채소 종자의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 외에도 우장춘은 화훼 원예의 발전에 초석을 놓는 등 많은 분야에서 품종을 개량하고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재배 방식을 개선하였다. 1950년대 우장춘의 동래 원예 시험장은 한국 농업 개발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씨 없는 수박’의 신화는 이미 일본의 기하라[木原]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었고, 우장춘은 다만 이를 실현해 보인 것뿐이었다. 이는 농업 정책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였던 당시 현실에서 과학의 힘을 실감케 하여 농정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의 공적은 한낱 ‘씨 없는 수박’이 아니라, 한국 육종학의 씨를 뿌린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산 동래의 한 모퉁이를 무대로 종자 개발에 몰두한 지 10년째, 우장춘은 당뇨병과 십이지 궤양 등 합병증이 겹치면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1959년 8월 10일 서울메디컬센터에서 사망하였다. 일본에서 급거 입국한 부인이 임종을 지켰고,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박사 학위 논문인 「십자화과(十字花科)의 게놈(Genom) 분석과 유채(油菜)의 합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구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57년 12월 23일 제1회 부산시 문화상, 1959년 8월 9일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수상하였다. 1999년 10월 2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 2동 850-48번지에 우장춘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2009년 4월 19일 우장춘 기념관 자유천 일원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