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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노모리 호슈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537
한자 雨森芳洲
영어음역 Amenomori Hosyu
이칭/별칭 우삼방주(雨森芳洲),준량(俊良),성청(誠淸),우삼동(雨森東),우삼동오랑(雨森東五郞),우삼등오랑(雨森藤五郞),백양(伯陽),방주(芳洲),귤창(橘窓),상경당(尙絅堂),상경재(尙絅齋),역재(櫟齋),취화헌(聚化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대표관직 재판차왜
출생 시기/일시 1668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9년 - 의사 교육을 받음
활동 시기/일시 1683년 - 기노시타의 문하에 들어감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쓰시마 번으로 이주, 중국어 배움
활동 시기/일시 1698년 - 조선 방좌역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02년 - 도주승습고경차왜 도선주로 부산 방문
활동 시기/일시 1703년 - 초량 왜관에서 조선어를 배움
활동 시기/일시 1711년 - 진문역으로 조선 통신사를 일본에 안내함
활동 시기/일시 1713년 - 관백고부차왜로 부산 방문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진문역으로 조선 통신사를 일본에 안내함
활동 시기/일시 1720년 - 진하차왜로 부산 방문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교린제성』 저술
활동 시기/일시 1729년 - 재판차왜로 부산 방문
활동 시기/일시 1747년 - 『귤창다화』 저술
몰년 시기/일시 1755년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우삼방주 선생 225년제 지냄
출생지 우삼촌 - 일본 자하현 이향군 고월정 우삼촌(滋賀縣伊香郡高月町雨森村)
거주|이주지 쓰시마 - 일본 쓰시마
묘소|단소 장수원 - 쓰시마 이즈하라
기념비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초량 왜관을 방문한 일본 쓰시마 번의 외교관이자 유학자, 어학자.

[가계]

휘는 준량(俊良), 성청(誠淸), 자는 백양(伯陽), 호는 방주(芳洲). 별호는 귤창(橘窓), 상경당(尙絅堂), 상경재(尙絅齋), 역재(櫟齋), 취화헌(聚化軒).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이름은 여러 사료에 우삼동(雨森東), 우삼동오랑(雨森東五郞), 우삼등오랑(雨森藤五郞) 등으로 나온다. 할아버지는 가병위청방(嘉兵衛淸房)으로 세키게하라[關ケ原] 전투[1600년 세키게하라에서 벌어진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승리하여 집권자가 되었음]에서 공을 세웠다. 아버지는 원좌우위문청지(源左右衛門淸之)로 후에 가병위청납(嘉兵衛淸納)으로 개명한 뒤 무사직을 버리고 의사가 되었다. 부인은 소하씨(小河氏)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한 명은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장남은 경호 감찰을 지낸 현지윤(顯之允)[또는 청원(淸元), 붕해(鵬海)], 차남은 학자 덕지윤(德之允)[찬치(贊治)], 삼남은 의사 준지윤(俊之允)[현철(玄徹)]이다.

[활동 사항]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 자하현 이향군 고월정 우삼촌(滋賀縣 伊香郡 高月町 雨森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 위해 1679년(숙종 5) 교토[京都]에서 의사 교육을 받았다. 1683년(숙종 9) 도쿄로 가서 대유학자인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훗날 정치가이자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립 관계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을 만났다. 22세 때인 1689년(숙종 15) 쓰시마 번으로부터 유학자[藩儒]로 초청을 받아 그곳에 머무르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1698년(숙종 24) 조선 방좌역(朝鮮方佐役)에 임명되고, 1702년(숙종 28) 도주승습고경차왜(島主承襲告慶差倭)의 도선주(都船主)로 처음 부산을 방문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말을 모르고는 통신사 등 외교 사절을 제대로 응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1703년(숙종 29)부터 1705년(숙종 31)까지 2년 동안 초량 왜관에서 조선말을 배웠다. 이때 조선어 입문 학습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편찬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쓴 「사게고지자사립 기록(詞稽古之者仕立記錄)」에 따르면 아메노모리 호슈는 매일 조선인 역관들이 있는 곳에 가서 조선말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역관은 왜관 북쪽에 살았는데, 그곳에 가려면 낮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그래서 비가 오면 가지 못하고 초량 왜관 정문에 있는 조선인 수문 군관(守門軍官)이나 수문 통사를 불러 조선말을 배우기도 하였다. 부산 출신 조선인을 자주 접촉하였기에 『교린수지』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 있었다. 후에 일본에서 『교린수지』 개정판에 나오게 된 이유이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조선말 공부에 주로 이용한 교재는 소설 『숙향전(淑香傳)』, 『이백경전(李伯瓊傳)』이었다. 조선의 다양한 면을 살필 수 있는 소설을 베껴서 공부하였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최충전(崔忠傳)』, 『임경업전(林慶業傳)』, 『옥교리(玉嬌梨)』 등의 소설도 베껴 갔다. 조선 고전 소설을 통한 조선어 공부는 이후 일본의 조선어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 외부성에서 이 책들을 활자본으로 인쇄하기도 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711년(숙종 37), 1719년(숙종 45)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를 수행하면서 조선인과의 사이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1713년(숙종 39) 관백고부차왜(關白告訃差倭), 1720년(경종 즉위년) 진하차왜(陳賀差倭)로 부산 초량 왜관을 방문하였고, 1729년(영조 5) 재판차왜(裁判差倭)로 부산에 왔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활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신(誠信)’으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외교관(外交觀)이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양국은 성의(誠義), 실의(實義), 신의(信義)로써 사귀어야 한다. 조선은 수백 년 이래 친한 나라지만 성신(誠信)의 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성신’은 맹목적인 친조선(親朝鮮)이 아니라 쓰시마의 정치적, 외교적 상황을 고려한 실리적(實利的)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관과 유학자로서의 기품은 조선인들 사이에도 알려져 있었다. 1711년, 1719년의 통신사 왕래 때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의 제술관과 비슷한 쓰시마의 진문역(眞文役)으로 활동하였다. 1719년 통신사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아메노모리 호슈에 대해 “한어(漢語)에 능통하고 시문(詩文)에 말할 줄 알아 일본에서 제일이라고 들었다. 능히 백가(百家)의 책을 정리하고 일본어와 다른 점과 같은 점, 문자의 쉽고 어려움을 알고 있다”라고 칭찬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조선인 역관 현덕윤(玄德潤)과도 친하게 지냈다. 현덕윤은 1711년 통신사행 때 일본을 방문하여 아메노모리 호슈를 처음 만났다. 1729년 아메노모리 호슈가 재판차왜로 초량 왜관에 왔을 때 현덕윤은 훈도(訓導)로 왜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재판차왜는 왜관에 체류하면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 업무를 하였고, 한양에서 파견된 훈도는 동래부와 왜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는 실무자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현덕윤은 동래부의 지원으로 1727년(영조 3) 훈도 집무소를 새로 건립하여 성신당이라고 하였다. 이에 아메노모리 호슈는 양국의 성신지교(誠信之交)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1730년(영조 6) 「성신당기(誠信堂記)」라는 기문(記文)을 써 주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755년(영조 31) 쓰시마 히요시[日吉]의 별장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703년(숙종 29) 부산에 와 초량 왜관에 머물면서 조선어 입문 학습서인 『교린수지』를 비롯하여 『유년공부(酉年工夫)』, 『을유잡록(乙酉雜錄)』, 『상화록(常話錄)』, 『권징고사언해(勸懲故事諺解)』 등을 저술하였다. 『교린수지』는 한자로 표기된 단어 아래에 한글과 일본어의 용례를 기록한 책으로, 조선의 신분 제도, 연중행사, 관혼상제, 의식주, 속담, 친척 관계 등 조선의 문화, 풍속, 관습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밖에 조선의 풍속을 적은 「조선 풍속고(朝鮮風俗考)」[1720년], 『교린제성(交隣提醒)』[1728]을 저술하였다. 『교린제성』은 동아시아 외교 관계, 특히 조선과 일본의 외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서로, “조선과의 교제나 교류는 조선의 인정(人情), 사세(事勢)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재판차왜로 있으면서 1729년(영조 5) 3월부터 1730년(영조 6) 9월까지의 업무 일지인 「재판 기록(裁判記錄)」을 남겼다. 이 기록에 왜관을 출입한 역관, 군관, 부산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여러 관계가 담겨 있어 왜관과 부산 지역의 교류 현황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735년(영조 11)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정리하여 쓰시마 번주[對馬藩主]에게 바친 『치요관견(治要管見)』을 지었고, 1747년(영조 23)에는 수필집 『귤창다화(橘窓茶話)』를 완성하였다. 『귤창다화』에는 초량 왜관에서 교유한 조선인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양국의 지식인들이 왜관에서 필담 창화(筆談唱和)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9~1984년 일본 간사이대학교[關西大學校] 출판부에서 『호저풍아집(縞紵風雅集)』, 『방주 문집(芳洲文集)』, 『방주 외교 관계 자료 서한집(芳洲外交關係資料書翰集)』, 『속 방주 외교 관계 자료집(續芳洲外交關係資料集)』 등을 묶은 『우삼방주 전서(雨森芳洲全書)』1~4가 출간되었다.

[묘소]

아메노모리 호슈의 묘는 쓰시마 이즈하라[嚴原] 장수원(長壽院)에 있다. 양쪽에는 부인과 장남의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아메노모리 호슈의 묘가 있는 쓰시마 장수원에서 직계, 방계 후손이 모인 가운데 ‘우삼방주 선생 225년제(雨森芳洲先生225年祭)’를 지냈다. 1990년 5월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행한 연궁중 연찬회 연설에서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 교류를 언급한 이후 한국에서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 왕래 때의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관과 활약상이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에 자극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 사업회인 방주회(芳洲會)가 만들어졌다. 첫 사업은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 정신인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비 건립이었다. 쓰시마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對馬歷史民俗資料館) 입구에 서 있는 비의 상단에는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이, 아랫단에는 ‘우삼방주 선생 현창비(雨森芳洲顯彰碑)’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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