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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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龍 |
영어음역 | Hwang Ry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이연심 |
[정의]
신라 때 부산 지역에서 왜구와 싸운 장수.
[활동 사항]
황룡(黃龍)은 구포 지역을 지키던 신라의 장수였다. 삼국 시대 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는데, 구포 지역은 고 김해만(古金海灣)의 동쪽에 자리해 왜구가 우리나라 내륙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왜구들은 쓰시마[對馬]에서 출발하여 고 김해만으로 들어온 다음 구포와 양산강 입구의 물금을 거쳐 양산 지구대를 타고 북상,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 서부 지역에 다다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에 따르면 신라는 50여 차례 왜구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왜구는 보통 수백 명이 떼 지어 해안이나 강변 지역 마을에 들이닥쳐 노략질을 하고, 때로는 3,000명 내외의 군대가 쳐들어오기도 하였다고 한다.신라 초기에는 울산만을 중심으로 경주에서 가까운 해안이나 왕성을 공격하였으나 5세기 이후 국가의 틀이 잡히고, 수도 방어 체제가 갖추어진 뒤에는 남해 연안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5세기 말엽 소지왕(炤知王) 때 기장 지역과 고 김해만에 왜구가 침입하여 임금이 기장과 고 김해만 동쪽에 성을 축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황룡이 구포의 성주로 있을 때 왜구가 대규모 군단을 갖추어 침략해 왔다. 이에 황룡은 군사 500명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웠으나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왜구의 우두머리는 목숨을 바쳐서 끝까지 싸운 황룡과 군사들을 보고는 더 공격해도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황룡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전설만 있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왜의 침략 기록과 구포 지역이 일본에 대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구포를 지키다 전사한 황룡의 활약상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뒷받침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상훈과 추모]
신라 조정에서는 나라를 위해 의로운 죽음을 택한 황룡과 병사들의 넋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들이 전사한 곳을 의성(義城)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