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4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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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梵魚寺大雄殿神衆圖 |
영어의미역 | Guardian Painting, Main Buddha Hall in Beomeosa |
이칭/별칭 | 「범어사 대웅전 신중탱」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서화류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은경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대웅전에 봉안된 개항기의 제석신중도.
[개설]
범어사 대웅전 신중도(梵魚寺大雄殿神衆圖)는 범어사 대웅전 우측 벽에 봉안된 불화이다. 수화승(首畵僧) 기전(琪銓)이 1882년(고종 19) 범어사 대웅전 영산회상도(梵魚寺大雄殿靈山會上圖),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梵魚寺大雄殿三藏菩薩圖)와 함께 제작한 불화이다. 호은문성(虎隱文性)이 증명(證明) 역할을 담당하였다.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범어사 대웅전 신중도는 세로 230.5㎝, 가로 231.8㎝ 크기의 비단에 채색을 베푼 것으로, 일곱 폭의 비단을 잇대어 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화면 상단에 녹색 원형 두광과 타원형의 신광을 갖춘 대자재천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범천과 제석천 등 천부상 3위가 배치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일월 천자와 천녀·천동 등의 천부중이 에워싸고, 그 아래쪽으로 갑옷과 무기를 갖춘 무려 33위에 이르는 신장상들이 일체의 여백 없이 4단으로 열을 지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신체 표현에 있어 상단의 중심 인물과 주변 권속들은 백색으로 칠한 반면, 33위의 신장상들은 붉은색 혹은 황색을 곁들인 피부색으로 묘사하여 위계를 구분하였다.
[특징]
대자재천의 좌우측에는 두관에 붉은 태양과 백색 달을 상징하는 원반이 장식된 일천자(日天子)와 월천자(月天子)가 양손에 홀을 쥐고 시립하고, 범천·제석천의 가장자리에는 갑주와 익상관을 착용한 신장상이 1위씩 외호하고 있다. 특히 새의 날개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익상관을 착용한 신장상은 위태천(韋駄天)[불교에서 호법신이나 가람의 수호신을 칭함]이 착용하는 투구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위태천의 경우 대개 얼굴이 동안(童顔)이면서 합장한 손 안쪽으로 금강저 혹은 보검을 받들거나, 양손에 이를 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범어사 대웅전 신중도의 경우는 동안이 아니라 수염이 길어 장년층의 모습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물도 보이지 않아 위태천으로 보기는 힘들다.
대자재천의 아래쪽 중앙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천동 10위로 구성된 그룹이 역삼각형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천부도상에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의 등장은 조선 15~16세기 천부도상으로 알려진 15세기 일본 즈이세키지[瑞石寺] 소장 제석천도, 1583년 일본 젠가쿠지[善覺寺] 소장 제석천도, 16세기 일본 사이다이지[西大寺] 소장 제석천도 등에서도 볼 수 있어 이와 같은 도상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채색은 차분한 붉은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신체와 내의에 백색, 광배와 착의 및 관모 장식에 강렬한 청색이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다. 1882년에 함께 제작된 범어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와 마찬가지로 수화승 수룡당 기전의 설채법(設彩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물 표정 못지않게 농담 있는 바림법과 모근의 세밀한 묘사 또한 범어사 소장 기전 작품의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사찰 대웅전에 후불탱을 봉안한 경우 거의 좌우측 벽에 신중단을 마련하여 신중도를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외 전각에서도 빠짐없이 찾아볼 수 있다. 범어사 대웅전 신중도는 조선 후기 신중도 도상의 몇 가지 유형 중 대자재천과 범천·제석천 등의 주존과 신중들로 구성된 19세기 신중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인물의 표현이나 채색 등에서 수화승 기전의 화풍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기전은 경상북도 사불산 화파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화풍을 답습한 화승으로, 범어사 대웅전 신중도를 통해 1880년대 부산 지역 범어사 권역으로 영역을 넓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